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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합(宮合)에도 3가지 차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한 적이 있다. 에너지가 뻗칠 때는 하단전(下丹田)의 궁합이 중요하다. 하단전 궁합의 요점은 섹스(sex)이다. 중년이 되면 하단전에서 중단전(中丹田)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이때는 돈(money)이다. 중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상단전(上丹田)의 궁합이 맞아야 한다. 상단전의 궁합이 맞는다는 것은 서로 '이야기'(talking)가 통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통하는 것같이 즐거운 일도 없다. '꿍짝'이 맞는 상대와 같이 있으면 세상사가 즐겁다.

청소년 시절에는 이야기가 서로 통했던 친구들이 그렇게도 많더니만,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니까 상단전 궁합 맞출 상대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다 먹고 살기 바쁘다. 한국의 중장년층들이 만나서 하는 주된 화제는 골프, 주식, 펀드, 자녀교육, 당뇨와 암, 부동산의 범주이다. '구원(救援)'과 '해탈(解脫)' 그리고 '미학(美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생로병사 가운데 앞으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노, 병, 사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같이 나눌 이야기 상대가 없다. 늙어가는 육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병들어서 겪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돈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넘어가겠지. 그러나 펀드도 반 토막이 났다. 돈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인생 사는 것이 우울해진다. 내가 관찰해 보니 한국 중장년층의 60%는 우울증이다.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겠지만, 거시적으로는 국민들의 상당수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조선후기에 호열자(콜레라)와 염병(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사회를 휩쓸었다면, 현재는 우울증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중이다.

우울증은 예방주사도 개발되어 있지 않다. 중장년층은 중단전의 궁합에서 상단전의 궁합으로 옮겨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연령층이다. 우울증은 상단전의 궁합이 맞지 않아서 생기는 증상이다. 아니면 상단전이 비어서 생기는 병증이다. 어떻게 해야만 한국 중장년층이 상단전 궁합을 맞출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엊그제 상단전이 허한 중년층들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상단전 전문 살롱인 옥란재(玉蘭齋)에 모여 밤새 떠들었다. 룸살롱이 아닌 상단전 전문 살롱이 많이 생겨야 한다.



방사(方士)클럽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 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1493~1582)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을 지어놓고 이렇게 읊었다. 나는 10년을 적금 부어 황토로 지은 토가삼간(土家三間)을 마련하였다. 축령산 자락의 휴휴산방(休休山房)이 그것이다.

아궁이에다가 소나무 장작, 편백나무 장작을 집어넣고 2시간 동안 달구어 놓으면 구들장이 쩔쩔 끓는다. 방문을 열어놓고 이 구들장에 앉아서 멀리 저녁노을에 잠겨 있는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노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느낀다. 옛날 고사(高士)들은 이러한 기쁨을 가리켜 '불환삼공지락(不換三公之樂)'이라고 하였다.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벼슬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배가 고프면 산방 뒤의 축령산 자락을 넘어간다. 산을 넘어가면 밥을 줄 사람이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길인데, 이 길은 50년 동안 조성한 편백나무 숲길이다. 날씨가 흐린 날 아침에 이 길을 걸으면 편백의 향기가 길에 낮게 깔려 있어서 산보자의 온몸을 감싼다. 마침내 세심원(洗心院)에 도착한다. 축령산의 살롱이다. 지인들이 가면 마음씨 후한 집주인은 손수 기른 상추와, 손수 담은 된장에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을 내놓는다. 50대 중반의 집주인은 군청 공무원 하다가 그만두고 세심원에 들어와 아는 사람들 밥해 주는 것을 낙으로 삼는 인생이다. 물론 돈이 되는 일은 아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너브실의 애일당(愛日堂)으로 간다. 대밭으로 둘러싸인 3500평의 고택인 애일당에는 15년째 백수로 살면서 내방객들과의 한담(閑談)을 업으로 삼는 집주인이 살고 있다. 마당에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인근의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모여 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정수입은 없지만 결코 굶어 죽지는 않는 클럽이 바로 '방사클럽'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죽설헌(竹雪軒)에 모여, 연잎으로 싼 찰밥을 먹으며 방사(方士)들끼리 우의를 다진다. 월급 안 나온다고 굶어 죽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왕국

보통 사람이 자살하면 주변 사람 수십 명 정도가 충격을 받는다. 많으면 수백 명이다. 그러나 연예인이 자살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다. 이번에 최진실씨 자살은 적어도 국민 수천만 명이 충격을 받는 사건이었다. 내가 받은 충격을 압축하여 표현한다면 '존재와 무'였다. 자살은 갑자기 존재에서 무(無)로 사라지는 사건이다.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하는 돈과 인기를 이미 손에 넣었던 존재가 한순간에 무로 사라져 버렸다. 돈과 인기도 '절대무'(絶大無)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생존에 대한 고통이 조금이라도 더 커지는 바로 그 순간에 자살한다. 평소에는 죽음의 공포가 생존의 고통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고통이 공포를 추월하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근원적인 공포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가지게 되는 공포이다. 이 공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자살은 이 본능적 공포에 스스로 자초해서 뛰어드는 행위이다. 얼마나 생존이 고통스러웠으면, 이 사대육신(四大肉身) 하나 건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생존은 고통이다. 생존에 따르는 고통은 인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생물과 동물은 예외 없이 생존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사자도 여차하면 사냥에 실패해서 배를 곯는다. 하이에나는 끊임없이 암사자가 잡아 놓은 먹이를 뺏어 먹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치타는 자기가 잡은 먹이를 표범이나 하이에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먹이를 나무 위로 끌고 간다.

아프리카 영양은 끊임없이 초원을 뛰어다녀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치타나 사자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다. 누우 떼는 강을 건너다가 운이 없으면 악어에게 잡아 먹혀야만 한다.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과정이 계속된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말은 못하지만 동물들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의 왕국에서 자살은 거의 없다. 나는 오늘도 '동물의 왕국'을 본다. 잡혀먹힐 때 잡혀먹히더라도 미리 죽지는 않는 그 강인한 생존의지를 배우고 있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탤런트 안재환이 자살을 했다. 대원외고-서울대 미대 출신의 엘리트 탤런트, 잘생긴 얼굴에 서글서글한 인상, 동갑내기 개그우먼과 지난해 결혼한 신랑.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사업 실패로 인한 막대한 빚이 자살 이유란다. 신앙생활도 잘 했다고 하니 ‘오죽 괴로웠으면 자살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그 심정을 백번 이해하더라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고통을 이겨낼 힘도 있다고 믿기에. 몇 년 후 재기에 성공한 안재환이 다시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땐 정말 죽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에.

자살을 한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 칼로 손목을 긋거나 올가미로 목을 맸다가 ‘차마 용기가 없어서’ 그만뒀다는 주위 사람도 많다. 당시에는 ‘죽음밖에는 이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구동성이다.

 자살이 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4위였다. 지난해에만 1만3000명이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년 전에 비해 네 배가 늘었다.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다.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1위란다.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한다. 부모의 이혼 등 결손가정이 늘어서, 외로움을 토로할 사람이 없어서, 스트레스 내성이 줄어들어서, 인터넷 자살 사이트의 영향을 받아서 등등. 그리고 주위에서 관심을 가져주고,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원을 늘리고, 소외된 사람을 위한 사회제도 확충 등의 해결책이 제시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비겁함이요, 도피다. 고통을 가장 쉽게 잊는 방법이 마약과 자살이다.

자살(suicide)의 어원은 라틴어 sui(자기 자신을)와 cædo(죽이다)의 합성어다. ‘내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살인’이다. 남을 죽여서 그 가정을 파괴시키는 것과 나를 죽여서 내 가정을 파괴시키는 게 얼마나 다를까. 자살은 무책임이다. 나는 죽음으로써 고통을 잊을 수 있다지만 남은 자들의 고통은 어찌하란 말인가.

  조엘 오스틴 목사가 그의 저서 『잘 되는 나』에 소개한 일화를 인용하고 싶다. 매사에 불평불만인 사람이 목사님께 상담을 하러 왔다.

목사님, 제 인생은 완전히 꼬였어요. 기뻐할 게 없어요.”

“좋습니다. 간단한 실험을 해보죠. 종이 왼편에는 기뻐할 일, 오른편에는 문젯거리를 쓰세요.”

“왼편에는 쓸 게 하나도 없어요.”

“아내가 세상을 떠나셨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뭐라고요? 제 아내는 건강하게 살아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건강하게 살아 있는 아내’. 집이 불탔다니 유감이군요.”

“예? 저희 집은 멀쩡해요. 정말 아름다운 집이죠.”

“오, 정말요? 그럼 ‘아름다운 집’. 직장에서 해고되셨다니 안타깝습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어요? 저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아, 그럼 ‘번듯한 직장’.”

이런 식으로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을 일일이 세다 보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당장 괴로워 죽겠는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화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죽음과 삶이 결정된다.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순 없을 거다.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

마침 베이징에서는 장애인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팔 하나가 없어도, 다리 하나가 없어도, 생각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열심히 달리고 던진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핸디캡이었을 거다. 그 고난과 고통을 극복한 이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감동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선조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서양이라고 다를까. ‘Better a live coward than a dead hero(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겁쟁이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생명은 귀중한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무조건 살아라.


 

죽고싶단 말밖에 - 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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