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뉴욕 로어 사이드(Lower Side)에서 태어난 루더 밴드로스(본명: Luther Ronzoni Vandross)는 어려서부터 가스펠과 소울 음악을 들으며 자라났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디온 워윅의 음악을 듣고 감명받은 그는 그룹을 만들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1972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에
삽입되었던 'Everybody Rejoice'를 작곡하며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오늘날의 루더가 있게 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것은 바로 데이빗 보위와의 만남이었는데 그의 앨범 [Young Americans]에 편곡과 백 보컬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베트 미들러의 앨범에 참여하게 됐고 샤카 칸(Chaka Khan), 링고 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도나 서머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의 앨범 작업에 함께 해 세션 보컬리스트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했다. 이에 힘입어 <코틸리온(Cotillion)> 레코드와 계약 한 그는 자신의 밴드 루더(Luther)를 결성하고 두 장의 앨범 [Luther], [This Close To You]를 발표했다. 그러나 너무 진보적인 사운드를 지향한 탓인지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하지만 ’81년 <에픽(Epic)>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발매한 솔로 데뷔 앨범 [Never Too Much]은 그의 진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며 놀라운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은 R&B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단숨에 플래티넘을 기록해 그의 음악 인생을 밝은 길로 인도했다. 이후 ’80년대 발표한 [Forever, For Always, For Love], [Busy Body], [The Night I Fell In Love], [Give Me the Reason], [Any Love], [The Best Of Luther Vandross] 등 거의 모든 앨범들이 플래티넘 이상을 기록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프린스와 함께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렇듯 화려한 ’80년대를 보낸 그는 그 후로도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을 과시했고 [Power Of Love], [Songs], [I Know] 등의 앨범을 히트시키며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R&B의 거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비단 R&B 보컬로서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레사 프랭클린, 디온 워웍, 다이애나 로스, 휘트니 휴스턴 등의 앨범을 제작한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도 활동해 그 명성을 떨쳤다.
가스펠과 소울 음악으로 풍성했던 가정에서 태어난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는 3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그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의 음악을 듣고 전율을 느끼게 된다.
1974년 데이빗 보위(David Bowie)는 그의 앨범 [Young Americans]를 작업하면서 루더에게 편곡과 백업 보컬을 부탁하게 된다. 그는 이후 데이빗의 투어에도 참여하게 되며 그를 통해 베트 미들러(Bette Midler)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베트의 앨범에도 참여하였으며 백킹 보컬리스트로 그녀와 함께 투어에 나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뮤직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유능한 세션 보컬리스트가 되었으며 이후 차카 칸(Chaka Khan), 링고 스타(Ringo Starr),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와 도나 섬머(Donna Summer)와 같은 대형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약을 눈여겨본 아틀란틱(Atlantic) 산하의 레이블 코틸리온 레코드사(Cotillion Records)는 그와의 계약을 서두르게 된다.그는 1975년 진보적인 R&B 그룹인 자신의 밴드 루더(Luther)를 결성하고 두 장의 앨범 [Luther], [This Close to You]를 1976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디스코를 배경으로 삽입시킨 이 앨범들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루더는 다시 세션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퀸시 존스(Quincy Jones),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그웬 거드리(Gwen Guthrie), 쉬크(Chic), 시스터 슬레지(Sister Sledge) 등과의 작업으로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굳혔다.
1981년 그는 에픽 레코드사(Epic Records)와 계약을 맺고 이번에는 솔로 앨범 [Never Too Much]를 발매하였다. R&B 차트 정상을 차지한 이 앨범으로 그는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이후 세릴 린(Cheryl Lynn)과 'If This World Was Mine', 디온 워익과 'How Many Times Can We Say Goodbye?'를 불러 인기를 더욱 굳히게 되며, 'Stop to Love'와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와의 듀엣곡 'There's Nothing Better Than Love'가 R&B 정상을 차지하면서 위상을 확고히 다졌다.
최근까지의 일련의 앨범들은 그가 80년대와 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소울 음악을 들려준 위대한 아티스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는 가수로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디온 워윅, 다이아나 로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앨범을 제작한 프로듀서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지난 20여년간 당대 최고의 남성 R&B 가수라는 타이틀을 차지해온 루더 밴드로스는 2005년 7월 1일 뉴저지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못 다한 춤, 다시 추게 되다 (2005-07-05)
지난 2년 간의 투병기 동안 90kg 가까이 몸무게가 늘었다 줄었다 할 정도로 심한 당뇨와 고혈압 증세를 앓아온 걸출한 소울 싱어 송라이터 루더 밴드로스가 지난 7월 1일에 향년 54세로 별세했다. 그는 지난 2003년에 당뇨로 사망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 [Dance With My Father] 출시를 불과 몇 주 앞두고 뇌졸증으로 쓰러져 2개월 만에 의식을 찾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총 8개 가운데 4개의 [그래미] 트로피가 그 이후 수여되며 공로를 치하 받았으나, 증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아 “꼭 80세까지 노래하고 앨범을 낼 것”이라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마이클 잭슨, 퀸시 존스, 아레타 프랭클린 같은 뮤지션들이 만사를 제치고 찾아와 애도의 눈물을 쏟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