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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어린이' 시절부터 '수니 로커(soony rocker)'까지...: 장필순과의 인터뷰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일시 및 장소:
2002년 12월 5일 서울 당산동의 한 연습실
2003년 7월 15일 고양시 중산의 카페 헌터스(Hunters)
질문: 신현준, 최지선, 최민우
정리: 배성록, 최민우, 신현준



대학교 캠퍼스라는 공간에 지금은 멸종(滅種)의 위기에 처해 있는 한 종(種)이 있었다. 학생회관 한 구석에서 '통기타 줄을 튕기면서 노래 부르는 예쁜 언니'라는 종이다. 기타 연주 실력이야 초보 수준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고 레퍼토리는 원만하고 대중적인 팝송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녀가 노래부르는 풍경은 드맑은 목소리와 무구(無垢)한 자태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더욱 이상적인 것은 한 명이 두 언니가 입을 모아 화음을 만들어낼 때이다. 음색이 서로 다르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알음알음으로 입소문이 나고 여기저기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서 이들을 '카수'로 숭배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탄생한다. 그러다가 그녀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종으로 진화하여 대를 이어갔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씨가 말라 버린 것 같다. 그게 멸종이 아니라 다른 종으로 진화해 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은 장필순의 전사(前史)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서울예전을 다니던 1980년대 초의 모습이 위에서 묘사한 것과 비슷했으리라... 이렇게 노래를 부르던 언니들 대부분은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 나이도 어느새 희미해져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장필순은 이런 푸념을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에서 노래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된 것 같다.

장필순이 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는 1990년 벽두에 솔로 가수가 되어 직업적 대중음악인의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노래 잘 하는 가수'이지만 이제는 '자기 세계의 깊이를 가진 아티스트'로 성장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른바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가 속해 있는 '하나음악'의 다른 음악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 그녀가 살아온 자취를 옮겨 본다. 그러다 보면 그녀의 나이가 다시 희미해져 버린다. 이제는 앞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래서 강남 어린이였던 시절, 대학연합 노래동아리 햇빛촌 시절, 친구와의 듀엣 소리두울 시절, 솔로 가수를 하던 시절, 그리고 어느새 하나음악의 간판 아티스트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두서없이 물어보고 순서대로 정리했다.

P.S.
여기 정리된 내용은 2002년 연말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있었던 공연을 앞두고 가졌던 짧은 인터뷰의 내용도 추가하여 뒤섞은 것이다. 그때 인터뷰라도 게재하여 공연의 홍보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최민우의 '개인사정'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터뷰는 싣지 못하고 6집 앨범의 리뷰밖에 싣지 못했다. 뒤늦게 올리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8월 중순 쌈지 스페이스에서 있을 하나음악 소속 음악인들의 연합공연과 9월 정동예술극장에서 개최될 예정인 장필순의 공연이 있다는 말을 전하면 미안함이 조금은 만회되려나...



강남 어린이, 내 작은 가슴에 햇빛촌을 맞이하다

Q: "강남 어린이"라는 노래도 부르셨는데, 당시 강남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 그 가사를 쓴 건 정원영 씨인데, 저랑 비슷한 또래라서 가지고 있는 기억도 비슷할 거예요. 그 때는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지는 않았죠. 허허벌판에 밭도 있고, 개울도 있고. 앞산에 가서 놀고, 밭둑길 걸어 다닐 때죠. 그러던 동네가 개발이 되고... 사고도 많았어요. 바로 집앞의 공터, 꼬마들이 놀던 놀이터가 매립이 되고 건물이 서고 했잖아요. 큰 트럭들이 흙 실어 날라서 늪 같은 걸 메꾸는데... 사고가 있곤 했죠 바로 앞 집 아줌마가 땅바닥에 앉아 대성 통곡하는 모습도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끔찍한 일인데 그땐 그런 일들이 가끔 있었던 것 같아요..

Q: 그러면 성장기에 즐겨 들었던 음악은 무엇인가요?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노래라던가...
- 글쎄, 물론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는 앞으로 음악을 하겠다던가 하는 구체적인 생각을 안 했었기 때문에... 사실 전 음악도 그렇게 많이 듣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가요는 거의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많이 어두워요. 저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아는 것 같아요. 랜디 밴워머나 제임스 테일러 노래는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주로 FM이나 AFKN 많이 듣고...

Q: 그럼 대학 입학 전까지는 음악을 하겠다는 지향이 없었던 건가요?
- 예, 그렇다고 봐야죠.

Q: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대학 시절로 넘어 오네요. 햇빛촌 시절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우선 햇빛촌의 인적 구성이나 결성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또 음악적인 리더는 누구였는지도...
- 특별히 만들어진 동기나 큰 뜻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였던 건데, 비록 아마추어였지만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성곡 대신 직접 쓴 곡 부르고, 기타 치면서 같이 노래하는 모임이었어요. 저녁이면, 빈 강의실 들어가서 둘러 앉아 각자 만든 곡을 들려주고. 모임치고는 굉장히 독특했어요. 멤버는 한승민 씨와 최기웅 씨, 이정한 씨. 이렇게 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이었어요. 한승민 씨는 서강대 출신이고 최기웅 씨는 서울예전, 이정한 씨는 홍익대학교 학생이었죠. 다 비슷한 나이 또래였는데, 두 세살 정도 많은 함영국 씨도 있었고, 최성호 씨 그리고 명혜원 씨 지금은 영화 감독하는 배경윤이란 친구도 있었어요. 염기정 씨와 김일준 씨도 있었고, (신)유미 언니는 주로 노래를 많이 하셨고... 멤버들보다 윗 기수인 선배도 몇 분 있긴 했지만, 특별히 누가 음악을 리드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네요.

Q: 주로 통기타로만 연주했나요? 기타를 특별히 잘 연주하던 멤버가 누구였는지도 궁금하네요.
- 그 땐 통기타만 갖고 했죠. 누군 리듬 치고, 누군 멜로디 연주하고, 또 누군 간주 연주하는 식으로 분담해서. 기타는 다들 잘 쳤던 것 같아요. 선배인 최성호 씨와 함영국, 한승민, 최기웅 이 셋이 중심이 됐던 것 같네요. 한승민 씨는 리듬 기타를 주로 쳤고, 최기웅 씨는 원래 기타를 잘 치던 분이었고...

Q: 노래 스타일은 주로 1970년대 포크송에 영향받은 스타일이었죠?
- 그랬죠. 주로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음악을 했죠. 지금 남아있는 건 별로 없지만 창작도 굉장히 활발하게 했는데, 햇빛촌의 자작곡이 무척 많았던 것 같아요. 또 지금 생각하면 7~80년대 통기타 음악보다는 우리가 했던 음악이 좀 더 (메시지 면에서) 강했어요. '강했다'는 말은 노랫말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뜻이에요. 민중가요 정도로 직설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회적으로 표현한 노랫말들이었죠. 4.19를 다룬 굉장히 처절한 노래도 있었어요. 멤버들 가운데 특히 한승민 씨가 작사를 참 잘 했어요. 글들이 너무 예쁜 게 많았는데... 러브 스토리를 담은 노래도 상투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어요. [햇살이 있는 풍경](1984) 앨범에 있는 노래들은 대체로 예쁜 노래들이 많지만.

Q: 그 때 만든 노래들 중에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나요?
- 저는 저에 대한 기사니 포스터니 뭐니 하나도 안 모으거든요. 정말 하나도 없어요. 보통은, 옆에 누가 스크랩 해주는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자기가 기념으로 모으곤 하는데... 저는 조금 모아놨다가도 다 버리곤 했어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요. 갖고 있는 게 노트 하나뿐이예요. 햇빛촌 시절에 부르던 노래를 적어놓은 노트가 있거든요. 스프링 노트 있잖아요. 그 안에 보면 가사만 빼곡이 써 있어요. 가사 위에 코드 적혀 있고.

Q: 한국 포크 음악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네요. 그런데 가사를 보고 멜로디가 기억이 날런지요?
- 다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 중에 너무 좋은 곡들이 많은데... 나중에 제가 언제 한번 불러 볼까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힘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아서 미루고 있죠. 지금은 하고 있는 음악 한 길만 지켜가려고 해요. 햇빛촌 때의 음악은 또 다른 색깔의 포크거든요. 가사도 시적이고, 시대적인 요소도 많고. 김민기 씨나 조동진 선배 같은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죠. 사실 초기의 포크 가수들은 기존에 있는 곡들도 많이 부른 케이스고. 실질적으로 싱어송라이터라고 한다면 김민기 씨나 한대수 씨나 조동진 씨 정도잖아요. 이정선 씨는 좀 나중이구요. 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분이 이장희 씨였던 것 같고... 햇빛촌의 창작곡 역시 그런 사람들의 영향이 있는 노래들이었어요.

Q: 음악을 잘 안 들었다고 말하더니 그래도 고등학교 때 방금 말한 음악들은 좋아하셨나 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국내 통기타 음악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 글쎄요. 아까도 말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진짜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좋아했다 어쨌다 말하기는 좀 그렇네요. 대학 들어가서도 그냥 햇빛촌 활동만 열심히 했죠. 기존의 유행가가 어떤지는 전혀 몰랐어요. 방금 한 이야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고... 햇빛촌에서는 거의 외부의 곡이 불려지거나 들려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완전 100%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들만 불렀어요.

Q: 햇빛촌은 공연도 했었나요? 카페 같은 곳에서라든가...
- 카페에서는 안 했어요. 그 대신 일주일에 한번씩 지금 명동역 입구에 있는 카톨릭 여학생 회관에서 주말마다 공연했어요. 거의 일년 넘게 했는데, 저희끼리 돈 걷어서 팜플렛도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팜플렛 돌리고 했어요. 그리고 한번 와서 본 사람들은 주말 저녁에 하는 걸 아니까 고정으로 보러 오기도 했었어요. 또 서대문 근처에 젊은 사람들 모이는 마당 같은 게 있었는데, 노사연 씨나 이광조 씨도 노래한 곳이었어요. 저희도 거기서 한번 공연했던 기억이 나네요.

Q: 이때의 햇빛촌과 나중에 생긴 다른 햇빛촌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 이정한 씨가 그냥 햇빛촌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죠. 여성 멤버 고병희 씨는 이정한 씨가 오디션을 봐서 뽑은 거지요. 그러니까 햇빛촌이란 음악모임은, 저희가 졸업한 다음 앨범 한 장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낸 셈이죠,

Q: 일종의 기념 음반이었던 셈이네요. 당시 햇빛촌과 유사한 노래모임인 징검다리(한양대)나 뚜라미(홍익대) 등은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같은 곳에 나온 것으로 아는데 햇빛촌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저뿐만 아니라, 햇빛촌 내에서는 '가수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저만 해도 노래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노래를 매개로 만나긴 했어도 각자의 일이 다 있고 노래는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영화를 하려던 친구도 있고, 카페 같은 것 하면서 짬짬이 나와 노래하던 언니도 있고, 그렇게 그냥 대학 생활 때 즐겁게 노래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러고 보면 햇빛촌이란 모임 자체가 대학 노래모임 중에서도 (요즘 말로 하면) 약간 '인디' 같은 성격이 있었던 것 같네요. 소속사 같은 데에 구애받지 않았고, 프로페셔널이라기보다 아마추어정신으로 활동했으니까.

Q: 햇빛촌의 음반 [햇살이 있는 풍경](1984)에서는 소리두울 이름으로 "눈 오는 날", "아침 햇살", "겨울로 가는 길" 등을 부른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때 이미 소리두울이 있었던 것인가요?
- 그 음반은 한 사람당 두 곡 정도씩 부르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정확히 무엇을 부른지는 음반을 들어 봐야 알겠네요(웃음). 그런데 음반 제작 당시에는 소리두울이란 이름이 없었어요. 음반에 소리두울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이 음반이 소리두울을 결성한 다음에 나와서 인쇄를 그렇게 한 것 같네요.

Q: 음반 녹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필순 님 경력에서는 최초의 레코딩이라고 할 작품인데... 그리고 이 음반은 1984년에는 오아시스 레이블을 달고 나왔다가 나중에 뮤직 디자인으로 바뀌었는데 그 경위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제 기억에 지구레코드의 벽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어요. 한 방에 들어가서 기타 하나씩 들고 둥그렇게 앉아서 녹음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작자가 누구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고, 오아시스에서 나온 이유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뮤직 디자인(대표: 서희덕)이 판권을 사들여서 다시 발매한 것 같아요.

Q: 조금 혼동이 생기는데 햇빛촌과 소리두울 간의 관계를 정리하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햇빛촌으로 언제까지 활동하신 건가요? 소리두울의 노래가 실린 [캠퍼스의 소리](1984)가 나왔을 때는 햇빛촌은 없어진 상태였나요?
- 글쎄요, 제가 졸업하고 나서도 다른 친구들은 4년제 대학교를 다녔으니까 햇빛촌이 한동안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졸업하고 난 뒤에도 서강대 가서 공연한 일도 있고... [캠퍼스의 소리] 음반이 나왔을 때는 햇빛촌으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러니까 햇빛촌 당시에는 소리두울이란 이름은 없었던 거죠. 햇빛촌은 동아리 비슷한 개념의 그룹이었으니까요. 노래를 해도 '햇빛촌의 누구' 하는 식으로 자기 이름으로 노래하는 식이죠. [캠퍼스의 소리] 음반에 나온 사람들과 함께 방송에 한번 출연했는데 그때만 해도 소리두울이 아니라 그냥 '김선희 장필순'이라는 이름으로 나갔으니까요.


그녀들에 관한 짧은 얘기: 소리두울(1984~1988)

Q: 그러면 이제 소리두울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김선희 씨와 어떻게 알게 되고 어떻게 소리두울을 만들게 되었는지...
- (김)선희와는 같은 과의 동창이었죠. 햇빛촌 이전부터 함께 노래하곤 했어요. 노래할 때 선희는 주로 메인 보컬, 멜로디 파트를 맡고 제가 코러스를 맡는 편이었죠. 대학 2학년 때 교내 가요제에 선희랑 둘이 출전해서 대상을 타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햇빛촌을 알게 되었고... 햇빛촌 때도 합창을 하면, 제가 화성 같은 걸 잘 넣는 편이었거든요. 남자는 함영국 씨나 (한)승민 씨가 주로 코러스를 맡았고, 여자는 제가 주로 담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Q: 그러다가 [캠퍼스의 소리]의 음반이 나오면서 소리두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이 음반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아까 방송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해서...
- 여기 참여한 가수들이 모두 '젊음의 행진' 출신이예요. 당시 '젊음의 행진'을 맡은 PD가 윤인섭 씨였던 것 같은데, 아마추어 가수들의 특집 무대를 마련한 적이 있거든요. 그 프로그램이 한번 생기면서, 오디션을 봐서 붙은 사람들이 한날 같은 프로그램에 나왔어요. 저랑 (김)선희도 우연찮게 출연하게 됐고.

Q: 방송에 출연해서 부른 곡이랑 음반에 실린 곡은 동일한 곡인가요? 아니면...
- 방송에서는 "아침햇살"을 불렀어요. 한승민이 작사하고 함영국 씨가 작곡한 노래죠(참고로 뒤에 소리두울의 독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캠퍼스의 소리]에 실린 "종이비행기"랑 "바람에 실려온 마음"은 제작자인 홍사인 씨가 구해온 곡이에요. 원래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캠퍼스의 소리] 때문에 연습한 노래인 거죠. 원래는 음반에서도 "아침햇살"을 부르려고 했는데 그 때가 햇빛촌 음반 나올 때랑 시기적으로 비슷했어요. 그래서 다른 곡을 부르게 된 거죠.

Q: 햇빛촌은 상당히 프라이드가 강한 집단이었던 것 같네요. 일반 대중가요는 조금 우습게 보았던 것 같고...
-그렇다기보다는 자기 내면, 자기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연습하다가 자주 싸우고 그랬어요. 그래서 햇빛촌 앨범도 거의 한 사람도 안 빠지고 공평하게 작업한 거죠. '젊음의 행진' 특집 방송을 하고 나서 홍사인 씨한테 "우리가 지금 햇빛촌 앨범도 준비하고 있고 해서 [캠퍼스의 소리]에는 참여 못 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보컬만이라도 하라고, 둘이 화성이 너무 좋다', '예전에는 이런 여성 듀엣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져서 아쉽다'면서... 이분은 그런 여성 듀엣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리고 이 때 대학교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었어요. 앨범에서 "그건"을 부른 권미경, 장경원도 자기들이 직접 곡 쓰고 부르는 여성 듀오였으니까요.

Q: 제작자인 홍사인 씨의 이름도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어떤 분인가요?
- 홍보나 섭외를 담당하던 사람이에요. 방송국 직원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들어와서 기획을 하던 사람이었고, 음반 제작자로서는 일반적인 분이었어요. 지금도 이벤트 기획 일 하신다고 들었어요.

Q: 음반을 녹음한 장소는 음반에 나와있지 않네요. 서라벌 레코드인 것으로 봐서 광화문의 랩 스튜디오가 아닌가 추측되지만....
- 정동에 고려병원 근처에 있는 서라벌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 같네요. 지하에 조그만 녹음실에서 작업했어요. 앨범이 서라벌 레코드에서 나왔으니까 거기가 맞겠죠. 8트랙 레코딩었을 거에요. 아마.

Q: 이 음반에서 코러스를 다섯손가락과 함께 맡은 것으로 나옵니다. 소리두울의 곡이 아니라 음반 전체에서 한 것인가요?
- 예, 거의 음반 전체에서 했죠. 대부분 했을 거예요. 다섯손가락도 '젊음의 행진'을 통해 음반에 참여하게 됐죠. 그 때는 학생들이었으니까. 상도동에서 지하 연습실을 빌려서 자기네들끼리 연주하곤 했었죠. 이 땐 다들 완전히 무명이었는데. 그런데 다섯 손가락 활동하신 이 다섯분들은 나중에 다 나름대로 자리매김 했잖아요. 세션연주하는 최태완 씨, 박강영 씨, 이두헌 씨... 세션도 했지만 다들 자기 곡 쓰고. 임형순 씨, 하광훈 씨도 마찬가지구요.

소리두울 시절의 장필순
Q: 그러고 보면 소리두울 활동은 굉장히 오래 하신 셈이네요? 한 4년에서 5년 정도? 소리두울 활동 때는 주로 어디서 노래하셨어요? 카페 같은 곳에서 하셨나요?
- 그렇죠. (김)선희랑 노래를 한 게 1988년까지 했으니까요. 소리두울은 주로 대학가 카페 같은데서 많이 했죠. 서강대나 신촌 근방에서요.

Q: 그때만 하더라도 다운타운이 많이 쇠퇴했을 때라서 카페 같은 곳에 무대가 많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 그렇죠. 딱 중간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 곳들이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곤 하잖아요. 예전에 무교동에 쎄시봉이니 명동에 쉘부르니 하는 곳들이 있었고. 나중에 그런 게 좀 쇠퇴하면서 많이 없어졌죠. 그래도 대학교 근처에는 그런 무대들이 남아 있었어요. 정식 무대는 아니고 간이 무대 수준이었지만...

Q: 그때 어떤 곡들을 불렀는지 궁금합니다.
- 일단은 저희들 노래를 많이 불렀죠. 팝송도 불렀구요. 에벌리 브라더스의 "All I Have To Do Is Dream" 같은 곡, 그리고 누구죠 컨트리 성향의 포크 가수의 노래도 불렀어요. 누구죠? 싱어송라이터는 아니고 그냥 싱어지만 얼굴도 지적으로 생기고 우리나라에서 꽤 알려진 사람인데... 포크는 포크인데 창법은 약간 컨트리 스타일이고... 어휴, 전 이렇게 생각 안나면 짜증나요(웃음). 그 여자가 할머니가 된 최근도 활동을 하거든요. 뿌리는 컨트리 음악이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워요(주: 아마도 에밀루 해리스를 말하는 듯). 아무튼 그런 노래들 많이 불렀어요.

Q: 소리두울이 교회쪽에서도 노래했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 소리두울 활동을 하면서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가수 김훈 씨의 동생인 분인데 그분도 원래 가수하던 사람이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어요, 그 분이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신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저희도 교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 거죠. 조하문 씨하고, 하덕규 씨하고, 허성욱 씨, 이무하 씨 기타 치는 손진태 씨하고 (김)선희하고 저하고 이렇게 모여서 벽지에 있는 교회 찾아다니면서 CCM을 불렀죠. 일주일에 한번씩 조하문 씨 집에 모여서 예배도 보고. 청년 전도하는 행사나 문화 행사에 가서 노래하고... 1년 정도 했죠. 그것도 처음에는 주말마다 다녔는데, 나중엔 시간 맞추기가 너무 힘드니까 한 달에 한번으로 줄어들고... 나중에 김훈 씨 동생이 미국으로 가면서 저희는 그만두게 된 거죠.

Q: 1986년 현대 백화점 지하에 있던 소극장 공연이 소리두울이 가진 공연이라고 알고 있는데 공연 못 본 사람을 위해 공연 스케치를 해 준다면... 그외에 소리두울의 공연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세요.
- 그게 소리두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죠. 최불암 씨의 부인이 하던 극장인데 백화점 지하에 있는 극장으로는 거기가 최초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어진 것 같네요. 그때는 강인원 씨도 거기서 공연하고 했죠. 처음에 생겼을 때는 공연을 많이 했는데 나중엔 미미해졌죠. 그때 세션으로는 조동익 씨가 베이스를 쳐주고. 게스트가 해바라기, 유익종씨 조동진 씨, 강은철 씨, 따로또같이 등 화려했죠. 아, 참 김현철 씨도 중학생 때 그 공연을 보고 절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박학기 씨를 통해서 동아기획이랑 인연 맺을 때쯤 다시 만나게 된 거죠. 김현철 씨가 곡 만들어서 '필순이 누나가 불러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만들고 나니까 회사에서도 흡족해하고 했죠.


또 어딘가를 향할 때...

Q: 김현철 씨나 동아기획 이야기는 조금 뒤에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소리두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는 햇빛촌이나 [캠퍼스의 소리] 관련 분들과 어울리다가, 언더그라운드의 '프로페셔널'과 만난 셈이네요. 이 분들과 만나게 된 건 언제부터쯤인지요? 추측이지만 소리두울의 앨범(1988)의 엔지니어가 정필영 씨던데요? 이 분은 뒤에 들국화와 인연이 많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 사연이 길고 복잡해요. 소리두울 활동하면서 만났다고 보면 맞을 거예요. 그전까지는 특별히 다른 인맥은 없었죠. [캠퍼스의 소리] 팀과의 인연은 음반 작업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햇빛촌'은 그만 둔 이후 따로 연락하진 않구요. 물론 지금도 연락되면 반가울 사람들이긴 하지만... 정필영 씨와는 직접 상관은 없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들국화쪽 일을 하시더라구요. 그 외에도 라이브 무대의 작업을 많이 한 분이죠.

Q: '긴 사연'을 차근차근 묻겠습니다. 먼저 따로또같이의 3집(1985)과 4집(1988)에서 코러스를 맡았는데 따로또같이 멤버들과의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요?
- 그분들이 저희를 찾아 오셨어요. 서로 우연히 만나게 된 건 아니고 [캠퍼스의 소리] 나오고 난 뒤 저희가 부른 "바람에 실려온 마음"이랑 "종이비행기"가 라디오에 나오면서 조금 알려졌어요. 같은 음반에서 다섯 손가락의 노래 "사라진 가을"도 많이 나왔죠. 그 무렵 방송에 출연하다가 우연히 따로또같이를 만났어요. 그때 같이 MBC 정동 홀에서 따로또같이 특집 공개 방송을 했어요. 그분들도 방송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FM 라디오 방송이었을 거예요. 그 때 따로또같이와 이미지가 맞는 팀을 고르다가 저희하고 같이 하게 됐는데, 끝나고 나서 커피숍에 앉아서 얘기하고 그러다가 알게 된 거죠. 그분들이 굉장히 반가워하시더라구요. 여자들이 기타치고 노래하니까... 이 때는 저 혼자 기타 칠 때거든요. 기타 치면서 여자 둘이 앉아서 노래하니까 그게 굉장히 반가웠나봐요. '예전엔 너희 같은 사람들(여성 듀오)이 더러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너무 반갑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을 알게 됐고, 그러다가 들국화 분들도 알게 됐어요. 들국화 분들이 첫 공연을 하는데 게스트를 구한 거예요. 하이얏트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기타 가지고 오디션을 보러 간 거였죠. 그때 전인권 씨를 처음 만났는데,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말도 잘 못하고.(좌중 웃음) 그분이 저희 노래를 들었는데 좋다고, 들국화 공연하는데 게스트로 초대했으면 좋겠다고... 저희야 뭐 너무 좋았죠.

Q: 들국화 멤버들과 만났을 때는 들국화 앨범이 나오기 전인가요?
- 그게 [우리노래 전시회] 나올 무렵이었어요. "너무 아쉬워 하지마" 들어 있는 그 음반. 들국화 앨범이 나온 건 나중일 거예요. [우리노래전시회] 음반이 들국화 공연 도중에 나왔었거든요.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하는 공연 중에 나와서 대학로 '난다랑'(주: 뒤에 ‘밀다원’으로 바뀜)에 모여서 같이 놀았어요, 최성원 씨가 커피 리필한 것을 들고 와서...(웃음). 조동익 씨, 김광민 씨, 한충완 씨 등이 다 있었거든요. 또 정서용 씨, 하덕규 씨, 최진영 씨... 게스트도 일반에게 알려진 게스트 말고 아마추어 위주로 구하고 있었어요.

Q: 오디션을 어떻게 보았던 말인지 정확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네요.
- 그러니까 저희가 어떤 노래들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그랬어요. 그 때 공연 연습을 전인권 씨 집에서 했거든요. 저희도 거기 가서 연습하고 그랬죠. 저희는 가서 가만히 앉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죠. 완전 생 소리로 연습을 하니까. 방의 크기가 이 카페 반 정도 (손으로 네모를 그리며) 딱 이만할 거예요. 거기 피아노 있고, 앰프 있고, 최성원 씨는 앰프 위에 앉아서 연주하고... 그 때 멤버는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 전인권 그리고 이원재 씨가 클라리넷을 연주했었어요. 아직 최구희 씨는 없었고 주찬권 씨는 있었어요.

Q: 그러면 언더그라운드의 대부 격이었던 조동진 님이나 김민기 님 같은 분들도 그때 알게 거군요?
- 그렇죠, 그때 다 알게 된 거예요. (전)인권 씨와 이주원 씨를 알면서 소개받은 거죠. 이주원 씨는 조동진 선배의 고등학교 1년 후배니까 절친한 사이였죠. 아무튼 들국화랑 따로또같이가 공연을 자주 했고 공연할 때면 그 분들이 오시니까 자연히 알게 됐죠.

소리두울의 노래가 실린 음반들. 위부터 [캠퍼스의 소리], [우리노래전시회 II], 그리고 소리두울의 독집

Q: 소리두울의 음반도 따로또같이 멤버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강인원 씨가 전체적인 디렉팅(감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단. 음반 관련된 이야기 좀 해 주시죠. '패밀리 프로덕션'이라는 곳에 대해서도...
- 소리두울 앨범은 따로또같이가 없었다면 못 만들었을 앨범이죠. 이주원 씨 곡도 있고, 강인원 씨 곡도 있으니까요. 녹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했지만 제작은 패밀리 프로덕션이 맡았는데, 이곳은 이명순 씨라고, 민해경 씨의 매니저를 했던 분이 하던 곳이에요. 그분이 원래는 '패밀리 프로덕션'이라는 곳의 사장이었는데 코리아 뮤직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예전에 민해경 씨가 코리아 뮤직 소속이었고, 따로또같이 출신의 강인원 씨가 민해경 씨에게 "장미" 같은 곡을 주면서 유명해졌죠. 민해경 씨가 한동안 강인원 씨의 곡만 가지고 활동을 했잖아요. 그 때 소리두울에게 앨범을 해보지 않겠냐고 강인원이 씨가 제의해 온 거죠.

Q: 소리두울은 음반을 내자마자 해체한 건가요?
- 그건 아니에요. 얘기하자면 길어요. 앨범 녹음도 오래 걸렸고. 아무튼 결국 (김)선희는 유학가서 지금 뉴욕에서 살고 있을 거예요. 결혼해서 애기 엄마가 되었죠. 연락은 거의 안 해요. 여자들끼리는 참 그런 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한번 멀어지면...

Q: 그 때 같이 어울렸던 분들은 대부분 동아기획 소속이 되었는데 소리두울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제가 동아기획을 알게된 것은 솔로 활동 하면서부터예요. 그 정도로 저는 가요계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거기 갔더니 그 전에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 다 계시더라구요. (웃음) 그러니까 서로 음악적으로 연결해 주고, 이런 게 거의 안 되는 사람들인 거죠. (웃음) 알아서 스스로 길을 파야 되지.

Q: 그러면 이 음반을 내면서부터는 프로페셔널하게 노래를 불려야겠다는 지향이 생겼다고 볼 수 있나요?
- 글쎄요, 그때도 그냥 한쪽 세계에만 있었던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드는 것도 사실 절실하게 해야겠다 해서 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만족했어요. 다른 사람 공연하는데 게스트하고, 좋아하는 선배들 공연에 코러스하고, 그냥 라이브하는 활동 정도로만. 항상 마음은 아마추어였죠.

Q: 코러스를 하면 경제적으로 수입이 되던 시기였나요? 이때쯤 코러스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 코러스 해봐야 수입은 그냥 차비나 되는 정도였죠. (웃음) 오히려 소리두울 시절 지나서 더 많이 했어요. 그 전에는 주로 이쪽 사람들 앨범, 조동진 선배, 강인원 씨 앨범. 따로 또 같이 앨범. 하여튼 그 안에서만 움직였구요. 그 이후로 솔로 하면서 (변)진섭 씨도 만나고, 그런데 새로 앨범 낸 후배들한테는 제가 다 선배 입장이었죠. 제가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많이 한 건 오히려 혼자 노래를 하면서, 그러니까 한 1990년 초반까지일 거예요. 한 2~3년 정도. 그 때가 (변)진섭 씨 같은 발라드 가수들이 한창 데뷔할 때예요. 신승훈, 변진섭, 강수지, 그리고 지예. 지예는 작사가였는데... 하여튼 그 때 그랬던 것 같아요.

Q: CM송 관련된 일을 했다는 말도 얼핏 들었습니다.
- 남산에 대한극장 근처에 있던 CM송을 만드는 예성기획이라는 사무실에서 많이 했어요. 이장희 씨 동생인 이승희 씨랑 강근식 씨랑 하던 데였는데, 이승희 씨는 거기서 음악 담당 쪽이었고,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 사장님이 한 분 계셨고... 아, 참. CM송은 그 전에, 이종명 씨라는 분이 운영하던 알파 프로덕션에서 처음 시작을 했어요. 거기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때 배철수 씨도 알게 되었죠.. 그 때가 한참 CM 송에 대한 개념이 시작되던 때였던 것 같아요. 소리두울을 하면서 했던 일인데, 그때 같이 많이 하던 친구가 이화 씨, 지예 씨(작사가 지예와는 동명이인), 그리고 우순실 씨가 있었죠. (우)순실하고 같이 많이 했어요. 예성기획의 레코딩 엔지니어라고 김헌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우순실의 남편이죠. 우순실 씨하고 저는 동갑내기이죠(참고로 우순실은 일산의 쉘부르에서 주 2회 노래를 부르고 있다).

Q: CM송 부른 것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 생각 안 나요. 그 일은 그냥 재미로, 어떻게 보면 돈벌이를 위해서 했던 측면도 있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느새 내 나이도 희미해질 무렵, 홀로 서기(1989~1992)

Q: 그러면 1989년 솔로 음반을 내면서부터는 이제 드디어 음악밖에 할 게 없는 상황이 된 셈이네요.
- 그렇죠 뭐. 결혼하기 전까지 재밌게 놀다가 시집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웃음)

Q: 1, 2집을 발표할 때까지는 본인의 색깔보다는 작곡자나 제작자의 영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퓨전 재즈나 보싸 노바 같은 음악의 영향도 강해 보이고... 그게 당시 '그쪽 동네'의 분위기였나요?
- 1집은 (김)현철의 영향이 컸죠. (김)현철 씨가 디렉터를 맡아서 했으니까. 대중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쪽 동네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좀 많은 사람들이니까요. 음악 자체로 보면 새로운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가더라도 이 사람들은 새 길을 파는 사람들이었죠. 음악은 각자 들었겠지만, 각각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들을 찾아 듣는 사림들이었어요. 그때 팻 메씨니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고. 일반적으로 들려오는 것만으로는 들을 수 없는 음악도 많잖아요.

Q: 누군가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해서 가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샤데이(Sade) 음악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웃음). 처음에는 샤데이를 잘 몰랐죠. 음반 내놓고 인터뷰하는데 기자들이 '샤데이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또 3집 나왔을 땐 수잔 베가(Suzanne Vega) 얘길 하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듣게 되었는데,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그런 정도일 뿐이에요.

장필순의 솔로 1, 2, 3집. 홀로서기

Q: '언론사 기자 같은' 질문입니다만(웃음), 초기작품이라고 할 만한 세 장의 앨범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은 어떤 것인가요?
- 글쎄 그런 거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 때 굉장히 열심히 했던 것 같고, '이 앨범이 잘 돼야 한다'는 것보다는 그냥 잘 해보고 싶은, 좋은 앨범 만들고 싶은 욕심으로 했던 것에 만족하는 거죠. 그런데 2집 같은 경우에는 약간 전체적인 통일감이랄까... 그런 면이 많이 흔들렸던 앨범이에요. 한국에는 싱글이 없으니까 그게 참 중요한데... 그 앨범은 제가 혼자서 진행을 맡다시피 한 앨범이라서 곡도 다 제가 뛰어 다니면서 모았어요. 그래서 곡의 작곡가가 다 다르잖아요. (김)현철이도 자기 앨범 하느라고 바빴고, 그 때 제일 많이 신경 써줬던 사람은 손진태 씨였어요.

Q: 그때 스튜디오(서울 스튜디오)의 조건은 어땠었나요? 이른바 가수나 음악인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나요?
- 그건 어차피 시간의 문제니까요. 요즘은 시간을 많이 쓰지만 그때는 한 20프로 정도? (Q : 6집은 한 200프로 쓰셨죠? (웃음) 6집은 뭐 집에서 했으니까...) 엔지니어로는 송형헌 씨가 3집까지 수고해 주셨죠. 아마 지금은 이민 가셨을 거예요. 제 앨범을 거의 끝으로 하고.

Q: 3집 발매하고 나서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공연했다고 하던데요.
- 1993년에 학전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었어요. 매번 크리스마스인지는 모르겠지만 12월에 했었어요. 그 때 학전에서는 거의 연극을 많이 했고, 대중음악은 가끔가다 (김)광석이나 (안)치환이가 했었어요. 3집 내고 나서는 거의 매년 공연했던 것 같아요. 처음 공연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은 부지런히 했죠. 나름대로는 그 때가 가장 많이 공연했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음향시설은 좋지 않았지만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 열심히 했었죠.

Q: 동아기획에서 발표한 두 음반의 경우 '계약조건'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 때도 아직 '인세제'같은 것은 아니었을 테고....
- 그렇죠, 일종의 '개런티'였고 그러니까 전속 계약인 거죠. 2년이면 2년. 액수는 그때 어떤 '선'이 있었고 다들 그렇게 했어요. 처음 독집 내는 사람들의 경우 받는 개런티가 정해져 있었죠. 그때 처음 받는 돈은 기타 한 대 사면 동 나는 것이나 다름 없었죠. (웃음) 그 다음에는 이제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구요.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3집도 조원익 씨 계시던 서울음반과 전속하는 개념이었죠. 그 때는 그런 데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대박터진 사람 말고는, 굉장히 가난한 직업이었잖아요. 지금은 많이 세상이 달라졌죠.

Q: '개런티'만 주면서 판권을 영구히 갖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음반 내주는 것만도 고마워 해라'는 분위기가 있었던 건가요?
- 아뇨, 동아기획은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때의 동아기획은 김영 사장이 음악하는 사람한테 많이 예우를 갖추었어요. 그리고 그곳에 속한 가수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입히는 대로 옷 입고 TV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같이 일을 못 하죠. 다른 음반사들에 비하면 동아기획이 나았죠. 어찌 보면 주인이 손님한테 많이 조심하는 분위기였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면 조용히 남아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적인 면에서도 제작자로서 기본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있었지만, 음악하는 사람들을 많이 믿은 편이었어요. 전인권 씨, 김현철 씨, 한영애 씨 등 마음이 다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으니까 김영 씨가 뭐라고 해도 말을 잘 안 들었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해도 '네'라고 그러고 안 해 버리고... 그때 김 사장님은 음반업계 사장 가운데서는 좋은 분이셨어요. 처음 음악 시작할 때 좋은 환경에서, 주위에 좋은 사람들 많이 모여있던 곳에 있었던 점은 고마워하고 있어요.

Q: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기획 시절에 발표한 음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른바 '베스트 음반'을 내려고 해도 그때 녹음한 곡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는 못할 텐데요.
- 제 '베스트 음반'의 경우 하나음악에서 나온 건 제가 직접 낸 거구요, 동아기획에서 나온 거는 김영 사장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스터 테이프를 가지고 낸 것이죠. 그래서 동아기획에서 나온 베스트 음반에는 1~2집에 있는 노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음악에서 베스트 앨범을 녹음할 때는 공연 중이었거든요. 공연 끝나던 날 바로 스튜디오에 가서 하루에 다 녹음했어요.

Q: 그럼 혹시 1~2집에 있던 곡들은 동아기획에서 새로 녹음할 수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요? 다른 음반사의 경우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냥 하신 건가요?
- 사실 그 원음을 쓰지만 않는다면 작곡자나 가수한테 권한이 있는 건데... 아무튼 동아기획에 얘기는 하고서 녹음했죠.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었는데, 그건 안 된다고 말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죠.

Q: 동아기획에 소속되어 활동할 때도 이런저런 음반에 이름이 등장하고(요즘 말로 '피처링'하고)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오장박(오석준-장필순-박정운)의 활동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 그전부터 그분을 알고는 있었어요. 소리두울 생활을 마감하고, 저는 들국화 선배님들이 '혼자 노래를 해 봐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색깔있는 보컬이다'라고 용기를 주셔서 노래는 조금씩 하고 있었어요. 다운타운가(종로나 대학로)에서 노래하고 그랬죠. 종로에는 예전에 미리내(피카디리) 극장이었던 곳에, 대학로는 국립극장 근처에 라이브하는 데가 몇 군데 있었어요. 그때쯤에 송홍섭 씨가 '송 스튜디오'라고, 마천동 쪽에 작업실 만드셨는데 그때 신윤철 씨, 신석철 씨, 박정운 씨, 한영애 씨 등이 거기 모여 있었어요. 마침 그 때 송홍섭 씨가 영화음악을 맡았는데 한번 앨범에 참여해보지 않겠는가, 라고 권유했어요. 오석준 씨가 방랑자라는 곡을 썼는데 아주 이쁜 곡이었어요. 그때 제 주위에서 포크를 한다는 여자 가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앨범에 동참하고, (박)정운 씨도 참가하고... 그렇게 하게 된 게 [굿모닝 대통령]의 O.S.T.였어요. 서희덕 씨가 아마 제작자였던 걸로 기억되구요.. 그 음반은 지구에서 녹음되었죠... 그후에 오장박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이 나왔더군요.

오석준, 박정운과의 조인트 앨범

Q: 마천동 스튜디오에 대해서는 송홍섭 님에게 간략히 듣기는 했지만 장필순 님의 경험도 듣고 싶습니다. 1990년대 초로 알고 있는데...
- 그게 아마, 제가 코러스를 많이 하고 있을 때였을 거예요. 그 때는 (이촌동의) 서울 스튜디오로 거의 출퇴근을 했었거든요. 가수를 개인적으로 알아서 했다기보다는 기획자나 음반 디렉터나 프로듀서들이 많이 부탁을 해 왔죠. 특히 그 때 한참 팝 발라드 스타일의 음악을 하던 하광훈 씨나 김지환 씨 같은 분들이. 김지환 씨는 변진섭 씨 등의 음반을 맡아서 한 사람이죠. 그런데 제가 그때 잠실에 살았는데 송홍섭 씨가 마천동에 '송 스튜디오'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도 근처고 하니까 자주 왔다갔다 하게 된 거죠. 그 때부터는 동아기획이나 서울 스튜디오보다는 마천동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렸죠. 한영애 씨도 거기서 3집 앨범 작업 하고 있었고, 김현식 씨도 그 때 마지막 앨범을 거기서 하고 있었거든요. "넋두리" 들어간 앨범이요.

Q: 그때 즘 김민기 님이 김독을 맡은 [겨레의 노래 1](1990)에 김순남의 가곡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여기 참여하게 된 경위는 어떤 것인가요? 음반에는 어떤날의 제작자인 최윤식 님이 진행한 걸로 나와있더라구요. 몇 년 뒤지만 김민기의 독집 앨범(4CD, 1993)에 수록된 '신곡' "철망 앞에서"에서 노래도 했고...
- 전체적인 작업은 최윤식 씨가 최성원 씨의 동생인 최성종 씨랑 맡아서 했죠. 준비나 컨셉트는 김민기 선배인 것 같구요. 왜냐하면 모든 공연에 관여하셨으니까. 김민기 선배는 어려운 선배였어요. 워낙 말씀이 없으시니까요. "철망 앞에서"는 나중에 하나음악에서 녹음한 거예요. 그 때 그걸 마지막 정리할 겸 녹음한다면서. 아, 그 때 그 앨범 하시면서 처음 인세제를 한 기억도 나요. 내 몫은 몇천분의 일인가 말하면서... 김민기 선배는 대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굉장히 여린 분이에요.

Q: 1990년대 이후 여기저기 스튜디오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필순 님도 리드 사운드, 가락 스튜디오, 녹스 스튜디오 같은 데서 음반 작업을 하신 것 같은데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저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리드 사운드는 김도향 씨가 운영하던 CM송 사업체인 서울오디오에 있던 분이 압구정동에서 운영하던 스튜디오예요. 처음에는 영화음악을 할 때는 음향 수준이 많이 떨어졌는데 그걸 최첨단 시스템으로 장비를 바꾸면서 사운드 면에서 많이 관심을 갖고 신경 쓰고 했던 것 곳이에요. 그때는 너무 좋았었어요 한영애 씨의 4집 음반, "불어오라 바람아" 들어 있는 음반이랑 양희은 씨 음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이 수록된 음반을 거기서 녹음했어요. 그 때 거기 엔지니어로 일하던 이훈석 씨는 미국에서 공부 끝내고 와서 메인 엔지니어로 들어온 분이에요. 제 음반 녹음할 때도 그분이 조동익 씨랑 같이 했죠. 그 무렵 좋은 시스템을 갖춘 스튜디오들 몇 개가 생겨났어요. 아마 장비가 디지털로 바뀌던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마천동 스튜디오도 기재 같은 건 아무 문제 없이 잘 해놓은 스튜디오였어요. 드럼 부스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장소도 널찍했죠. [하나 옴니버스] 음반을 녹음한 가락 스튜디오는 '메카'라고 부르던 곳인데 임창덕 씨라고, 조용필 씨 음반 거의 다 작업하신 분인데 이분이 계신 곳이었어요. 나중 일이지만 5집(1997)을 녹음한 녹스(Knox)라는 곳은 제일제당 스튜디오예요. 강남에 힐탑 관광호텔 바로 옆에 있는 건물 지하에 있는 곳이었는데, 그 건물주가 최진실 씨라고 그러더군요(웃음).

Q: 그때 하나음악은 논현동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스튜디오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논현동 스튜디오도 있긴 있었는데, 사실은 저희 하나음악 스튜디오는 음반을 녹음하려고 만든 스튜디오가 아니었고 연습실로 만든 거였어요. 나중에는 녹음 작업도 했지만...

'수니 록(Soony rock)'의 어제, 오늘 그리고...

Q: 되돌아 보면 동아기획에 모였던 사람들도 1992년 쯤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음악도 그 무렵 탄생했고.... 한편 다른 분들은 주류 연예인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언제 이후 이런 관계가 좀 끊기신 거예요? 쉽게 말해 '노는 물'이 달라진 시점이... 그리고 이전에 '음악 하다가 잘 안 되니까 삐딱선을 타는 것 같다'고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인가요?
- 아, 그건 음악적인 얘긴 아니구요, 음악 하다 젊은 나이에 그만 두는 사람도 많고, 카페나 레스토랑 차리기도 하고... 그런 경우를 얘기하는 거예요. 나쁜 뜻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하나음악이 생기면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네요. 하나음악 생기던 게 1992~93년쯤이었는데. 그 때는 그 안에 있는 사람 말고는 거의 안 만났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싫어서 안 만나고 하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제가 찾아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은 없는 거죠. 그런데 김현철 씨도 그때는 가끔씩 하나음악 사무실에 놀러 오기도 했어요.

Q: 하나음악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 말고는 거의 안 만나는' 상황이 되면서 그때 이후 장필순 님의 음악도 우울해지는 것 같습니다.
- 그건 제 인생이 그런가 보죠 뭐...(웃음)

Q: 4집부터 본인이 직접 작사와 작곡의 일부를 담당하고 음악 스타일이 이른바 '모던 록'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통상적 평가입니다. 하나음악 내부에서 그런 방향을 정한 것이 있었던 것인가요?
- 4집은 과도적이었어요. 제작을 조동익 씨와 제가 한 것이었으니까 마음껏 할 수 있었죠. 돈을 빌려서 조동익 씨랑 둘이서 작업한 것이니 누구의 간섭이 없었죠. 1집부터 3집까지도 음악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작업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상업성 따지고 하니까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개입이 있었죠. 그걸로 마찰도 가끔 생기고 그랬는데. 4집 때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으니까 좋았고 자연스럽게 모던 록 스타일로 넘어가게 된 거죠. 하고 싶었던 면을 좀 더 반영할 수 있었고...

Q: 이때도 그렇고 작곡할 때는 기타를 치면서 하시나요? 피아노를 치면서 하시나요? 아니면...
- 기타로 많이 해요. 피아노로 하면 자꾸 발라드 느낌의 노래가 나와서... (웃음) 기타로 하면 좀 낫죠.

Q: 4집에서는 작사와 작곡 진용에 장필순 님 본인과 프로듀서인 조동익 님 외에도 윤영배, 고찬용, 이무하 님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전 시기의 김현철, 손진태, 정원영 님을 포함해서 자신의 스타일과 가장 부합하는 곡을 쓴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 앞서 말했듯 3집 이전과 4집 이후는 환경이 달라진 것이니까 비교할 수는 없구요. 그냥 다 다른 것 같아요. 그 '부위'가. (웃음) 윤영배는 유재하 가요제 출신인데 제 4집 앨범부터 세션에도 참여하고 기타는 자기가 연주했어요. 이때부터 제 앨범은 저하고 조동익 씨하고 (윤)영배 씨하고 셋이서 작업하게 된 셈인데 마인드가 너무 잘 맞아요. (윤)영배 씨에게는 수 년전부터 앨범을 만들자고 하고 있는데 그 친구도 뭐...('하나 음악 식구답게 게으르다'는 뜻인 듯^^)

Q: 5집은 하나음악이 '재건'되면서 발표한 첫 작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운드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녹음 과정에서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는지요?
- 6집 같은 경우엔 녹음 한번 했다 이렇게 다시 하고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다른 앨범들은 녹음하는 기간이 굉장히 짧은 편이었어요. 한 달 정도 잡아서 한번에 확 해 버리거든요. 만들기 전에 준비를 좀 철저히 하고, 완전히 모든 게 다 정리가 돼서 '이제 녹음해도 되겠다'고 판단하면 스케쥴 잡아서 되도록 짧은 시간에 녹음하곤 했죠. 스튜디오 사용에 비용이 드는 문제도 있고. 5집 같은 경우만 해도 녹스 스튜디오에서 했는데. 최소한의 프로 수로 모든 걸 다 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녹음하려고 하니까 (박)용준이가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처음 녹음할 때 "첫사랑" 같은 곡에서 피아노 몇 개 치고 가게 되어서 (박)용준이가 다녀 오면 나중에 건반만 따로 하기로 했죠. 그런데 녹음을 다 해놓고 나서 건반만 집어넣으니까 어레인지가 흐트러지고 아무튼 기분이 '이건 좀 아니다' 싶더군요. 처음부터 같이 했으면 모르지만. 그래서 '그러면 건반 없는 상태에서 마무리해 보자'라고 정하고 연주를 한 것이죠.

Q: 이 앨범에서 "너의 외로움이 나를 부를 때" 같은 곡은 '조동희 작사, 조동익 작곡'인데 제가 듣기에는 작곡도 그렇고 편곡도 그렇고 조동진 님의 곡처럼 들립니다. '1970~80년대 포크 음악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관련해서 조동진 님은 장필순 님의 음악에 어떤 식으로 조언을 주시는지요?
- 가끔 조금씩 얘기를 하시지만 거의 안 하시는 편이에요. 아주 안 한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5집의 경우 색깔을 살리려고 건반을 다 빼고 했잖아요.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도 그런 식으로만 했는데, 조동진 선배가 "요거는 스트링을 좀 넣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하면 앨범의 색깔은 달라질지 몰라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시는데 워낙 말씀이 말씀이니 만큼 다들 듣고 있다가 '네..'하고 대답하죠. 그런 식으로 부분 부분 포인트를 짚어주시는 역할을 하세요. 4집에 실린 "혼자만의 여행"도 사실 조동익 씨가 그 노래를 다 만들고서도 제목을 못 정했어요. 나중에 조동진 선배한테 가서 들려 드렸는데, 한참 있고 계시더니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런 힘이나 영향력이 엄청나시죠. 그분한테 통과가 안되면 음반을 내지 못하죠(웃음). 음악적인 문제는 조동익 씨가 총괄해 주고 마인드 같은 것은 조동진 씨의 비중이 크죠. 6집 음반의 경우도 가사 같은 게 미흡한 게 있으면 지적해 주셨어요.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제 노래 같은 경우 제가 만약 '지나간다'라고 하면 '흘러간다'고 해라... 이를테면 그런 식이죠. 그 단어 하나로 전체 가사가 고급스러워지는 거죠.

장필순의 솔로 1, 2, 3집. 홀로서기장필순의 4집, 5집, 6집...'홀로서기'에 이은 '제 발로 서기'.

Q: 그게 음악의 장르나 스타일에 대한 간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포크'라든가 '퓨전 재즈'라든가 '모던 록'이라든가, '테크노'라든가 그런 장르의 구분...
- 예, 그런 건 없어요. 그건 사고의 문제지 형식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여지껏 그렇게 해왔던 거 같고. 조동진 선배가 봤을 때는 예전에 본인이 했던 것과는 많이 변화된 거라고 느끼실 거고, 또 하나음악에 새로운 음악 색깔을 가진 친구들이 들어오고 하니까요. 그런데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조동진 선배나 조동익 씨나 두 사람이 항상 도전적이에요. 조동진 선배 음악도 처음 포크를 했을 때랑 지금이랑.. 지금 그 나이에 그런 음악을 한다는 건 주위에 비교해봐도 없거든요. 조동익 씨도 마찬가지고. 그게 댄스나 테크노 뮤직은 아니지만 항상 새로운 걸 들여다보고 귀기울일 줄 아는 그런 면을 보아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6집 앨범 경우에도 전자 음향이 많지만 조동진 선배가 들어보고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Q: '문제작'으로 평가받은 6집 앨범에 대해 세세한 질문 몇 개를 드려보겠습니다. 6집 앨범을 초기에 녹음했던 것은 지금 같은 사운드가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전자음향 많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고... 다 만들어 놓고 '엎은' 건가요?
- 처음에는 하나 스튜디오에서 리얼로 녹음했죠. 밴드가 리얼 연주(실제 악기로 연주하는 것)를 했어요. 하긴 했는데 나중에 그냥 새롭게 하고 싶어서... 이유는 간단해요. 제가 앨범 작업을 거의 마무리할 때 다른 사람들 음악 들었거든요. .. 뭔가 할 때는 내 것에만 묻혀 있고, 조동익 씨도 마찬가지고. 저는 제가 하는 음악이 실험적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보니까 미디 작업이나 홈레코딩 작업이 일반화되어 있더라구요. 그걸 알고 한참 시간을 끌었죠. 엎기는 그전에 엎었는데. 그런 음악 듣고 난 뒤 '어설프게 하면 창피만 당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걸 그 때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죠.

Q: 그렇게 엎고 다시 작업하기로 한 게 언제쯤인지요? 그리고 6집에 실린 곡들이 전부 그렇게 된 건가요?
- 2002년 봄 정도? 그 땐 작업을 많이 했는데 또 한번 엎어서 미리 했던 걸 또다시. 큐베이스 같은 곳에 기본으로 들어있는 소스를 수 천번 섞어서 나한테 맞는 소리를 찾는 거지요. 제가 노래할 때 탁성이잖아요. 탁성인데도 부드러운 맛 나는 거, 이를테면 록 음악이라도 가장 정리된 분위기가 저한테 어울리는 거 같아요. 맞는 음악을 하는 게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 전자 소스 찾는 데도 고생 많이 했어요. 사실 현 소리같은 것도 엄청나거든요. 그걸 다 들어야 되니까. 녹음하는 과정보다는 소리 찾는 시간이 몇 배는 걸렸던 거 같아요. 결국 그 전에 녹음한 건 거의 다 버렸어요. 이 안에 있는 곡 중에 "십 년이 된 지금",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흔들리는 대로"는 원래는 리얼 연주로 했었어요. 원래 작업했던 걸 가지곤 있는데 어딨는지는 모르겠어요.

Q: 그러면 멀티트랙 레코딩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모두 집에서 하드 디스크 레코딩으로 작업했다는 말인가요? 음반을 들어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죠. 노래랑 코러스는 합정동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노래도 가급적 집에서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구요. 집에서 며칠 연습한 뒤에 가서 녹음했죠. 그리고 나중에 모두 컴퓨터로 들어가긴 했지만, 기타, 베이스, 건반은 리얼 연주로 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는 다 만든 소리죠. 그저 한번 이야길 하다가 예전에 작업한 걸 다시 작업하려고 멀티를 열어봤는데 성이 안 차더라구요. 2년이 지난 앨범이니까. '다시 녹음하자' 마음 먹고 '실험적 색깔로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라고 이야기하다가 '그럼 미디소리를 써보자. 조금만 써보자' 이랬다가 결국은 100%가 되어 버렸어요. 정말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애착이 많이 가요.

Q: 녹음 과정에서 이종학 씨가 고생하셨다던데요. 음반 표지에 "여행가방을 들고 와서 합숙하다시피한..." 이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 워낙 이종학 씨가 미디 사운드 쪽으로 많이 알거든요. 공부를 많이 한 친구라. 조동익 씨랑 고생을 많이 했죠. 서종칠 씨는 집에서 작업하는데 거의 먹고 자고 했죠. 그리고 규칙적으로 못하니까 하다가 안되면 막 놀다가... 그러니까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죠. 재밌었어요. 몇 달을 그렇게 살았으니까.

Q: (조)동익 님은 언제부터 미디 작업을 시작한 것인지요? 또 작업할 때 프로그램은 어떤 것을 사용하신 건가요?
- 전자음향 작업을 한 지는 오래 되었죠. 예전에 [Movie](1998)라는 앨범 있었죠. 그거 작업할 때 용준씨와 프로그래밍 작업을 했어요. [넘버 쓰리] 사운드트랙 작업을 할 때도 그랬고. 그런데 본격적으로 미디는 이번에 시작한 거예요. 그분이 뭐 하나를 파고들면 무서울 정도예요. 작업은 큐베이스로 했어요. 누엔도 같은 것도 쓰고... 몇 개를 섞어서 하는 거 같았어요. 저는 컴맹에 가까워서 옆에서 지켜보기는 했지만 작업을 주도한 것은 아니죠. 제가 했던 일은 맞는 소리 찾을 때 같이 하는 거. 버튼 몇 개 가르쳐 준 것으로 연습해 보는 정도였죠.

Q: 단지 사운드 뿐만 아니라 '엎은' 다음에 작곡도 새로 한 것이 있나요?
- 그럼요. 조동익 씨 것은 다 새로 만든 거예요. 그전에 서너 곡 있었는데 그전에 있던 걸 다 버린 거죠. 너무 아까워서 '요거 놔뒀다가 나중에 쓰자'고 그랬는데... 조동익 씨는 예전 것들에 미련을 갖지 않더라구요. , 배울 점이, 곡을 새로 쓸 때는 울궈먹고 찾아서 쓰는 게 아니라 새로 주제를 잡고 쓰더라구요. 저보고도 '다 버리고 새로 하라' 그래서 저도 새로 썼어요. "헬리콥터"도 그렇고.

Q: 불행히도 이번 6집 앨범의 수록곡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에서는 잘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한 곡의 러닝 타임이 다 4분을 넘고 5분 가까이 되고... '포크' 냄새가 나는 곡도 없고....
- 신경 안 썼어요. 예전엔 녹음하다 너무 길다고 그러면 반복 부분은 하나 들어낸 적도 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사실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도 라이브하면 6분 넘는 곡인데 저런 식으로 다 짤린 거예요. 이번 앨범 작업 시작하면서 얘기 나온 게 '그런 걸로 제한 받지 말자', '음악적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거 다 무시하고 이번에 이렇게 해보자' 그런 거였어요. 개인적으로는 좋아요.

Q: 개별 곡 몇 개에 대해 궁금한 것 물어보겠습니다. "모래언덕" 같은 곡은 '월드 비트'의 리듬을 사용한 것 같더군요. .
- 그건 조동익 씨 아이디어죠. 그것도 몇 번 바뀌었어요. 사막 위에 작열하는 태양을 영상으로 보면 아지랑이 같은 게 생기잖아요. 처음에 그런 분위기로 만들어 놓고 차에서 듣는데 다들 믹싱을 잘못한 줄 아는 거예요. 그거 만들면서 어떨 때는 낙타가 있는 사막도 떠오르고, 다를 때는 아프리카의 밀림의 느낌도 들고... 그런데 사막과 밀림이라는 두 가지 분위기가 묘하게 교차되더라구요. 어떤 사람은 '밀림같다'고 그러고, 다른 사람은 '사람은 사막에 낙타 타고 지나가는 그림이 떠오른다'고 그러고... 그런 반응을 보고선 우리가 생각한 거랑 잘 맞는다 생각했죠.

Q: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는 자작곡인데 이른바 일본의 시부야 사운드와 비슷하게 들립니다(주: 다시 들어 보니 별로 비슷하지 않지만...).
- 그 곡은 예전에 6집 앨범 시작하려고 만든 곡인데, 리얼 연주로 녹음 해놓은 걸 다시 미디 작업 한 것이죠. 일본 음악은 잘 몰라요. 우리는 작업할 때는 다른 음악을 듣지 않으니까. 고쳐 나가야 할 점이죠.

Q: 수록곡들 가운데 제일 아끼는 곡은 "Soony Rock"과 "신기루"일 것 같습니다. 공도 많이 들인 것 같고... 맞나요?
- 저는 "고백"도 좋아하고, 특별히 아끼는 곡은 없어요. "신기루"는 '멋있는' 곡이에요. 곡 안에 강약 같은 걸 들으면서 찌릿찌릿하는 기분이 들어서 멋있다고 느껴지고, "고백"은 노래같다기보다 들으면서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는, 음악에 푹 빠지기보다는 진지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Q: "고백"이나 "동창" 같은 노래는 가사가 특이합니다. 누구의 경험을 노래한 것인지요?
- "고백"이란 노래는 조동익 씨의 실화예요. 새끼 거북이 키우다가 두 마리 중에 한 마리 죽어가지고 한 마리는 호수공원에 놓아 주었어요. 러닝 머신은 사 가지고 일주일 쓰고 선배한테 줬죠. 하하. "동창"은 윤영배 씨의 친구 얘기라더군요. 윤영배 씨 경우는 자기 얘기를 가사로 많이 쓰더라구요. 그게 공감이 가고. 그리고 "동창"은 아주 오래 전, 5~6년 전에 만든 곡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가사도 크게 '센' 단어가 없는데도 절절이 슬프더라구요. "십 년이 지난 지금"하고 "동창"이 비슷한 때 만들어진 거예요. 이미지가 비슷하지 않아요?

Q: 조동익 씨가 기타까지 친 것 같네요. 장필순 님 본인은 녹음 때는 연주하지 않았나요? 공연 때는 기타를 직접 치던데...
- 자기 앨범에는 꼭 기타쳐야 되고, 예전에는 그런 욕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Q: 이번 앨범 작업을 해보니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갈 생각이 드시는지요?
- 그거는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머니도 몰라요. 이번 앨범의 느낌은 개인적으로 잘 맞는 거 같아요. 이렇게 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도 않고. 희소가치가 있는 게 좋더라구요. 요즘은 저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싫다'기보다 '모르겠다'는 것이죠.


2002년 12월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장필순의 '멀티미디어 공연'

Q: 6집 발매 후 가졌던 예술의 전당의 자유 소극장 공연에 대해 몇 가지 묻겠습니다. '비주얼'한 요소가 강조된 컨셉의 공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 소극장적인 공연, 즉, 관객과 직접적으로 만나서 그런 게 아니라 마치 현장에 와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원래가 공연 때 별로 말을 안 하지만, 그 공연 때는 아예 멘트가 없었어요. 물론 팀 소개는 해야 하니까 그런 정도만 했죠.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안 할 정도로... 불 딱 끄고 끝나면 나가는 기분.

Q: 세션 진용은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조동익 님은 끝내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것 같고...
- 조동익 씨는 오히려 무대 아래에서 있어 주는 게 좋아요. 앨범에서 디렉팅하듯이 공연도 무대 아래 있어주는 게 좋아요. 다른 분들은 김정민이라는 분. 그 친구는 많이 알려진 친구는 아닌데 드럼의 임거정 씨랑 같이 밴드에서 활동하는 친구에요. 너무 맘에 들고 조동익 씨도 첫 곡 치는 거 보고 너무 맘에 든다고 하더군요. 프렛리스 베이스도 조동익 씨과 똑같은 거 갖고 있더라구요. 기타는 고찬용 씨가 몇 년만에, 몸도 많이 아팠지만 함께 해 주셨죠.. 어쿠스틱은 오소영 씨가 세션으로. 일렉트릭 기타는 김준오라고 김정렬 씨랑 같이 '버드'라는팀을 하는데. 이번에 기타만 했죠. 박용준 씨가 건반을 해 주시고 다들 호흡이 잘 맞았어요.

Q: 전자 음향이 많았던 음반의 사운드를 라이브로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가령 "헬리콥터" 인트로의 전자 음향 같은 경우는 리얼 연주로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니까 하드 디스크 레코딩 작업한 것을 그대로 썼어요.

Q: 굉장히 모험적인 공연이었을 텐데 부담은 없었나요?
- 제 공연 색깔이 그전까지 어쿠스틱 사운드가 많았기 때문에 전자 소리들을 넣고 변화를 주었던 것이죠. 6집 앨범 작업할 때 앨범 컨셉트를 180도 뒤집으면서부터 생각했던 거죠. 6집 앨범이 나오고 첫 공연이니만큼 앨범의 소리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저는 사실 보여주는 거보다 들려주는 걸 90%라고 생각하지만 나머지 10%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하니까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영상도 기존에 있는 소스로 하기 보다 조동익 씨가 찍은 사진 작품들, 저에 대해 이미지를 찍어놨던 것들을 가지고 영상 작업을 했어요. 비디오 작업이 굉장히 재밌더라구요. 의도만 있다면 얼마든지 음악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고.


돌아 앉은 세상, 뒤로 달리는 어지러운 풍경...

Q: 공연도 그렇고 음반도 그렇지만 6집 경우에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평을 들을 것 같습니다.
- 글쎄.... 요즘 음악이나 음악계 상황들이 워낙 서양음악을 항상 쫓아가는 것 같아요. 설사 뭔가를 생각해 냈어도 찾아 듣다보면 그런 게 이미 다 있잖아요 예전에야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장르도 없어지고... 들으면 들을 수록 좋은 음악은 다른 게 아니라 '깊이'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음악도 들으면 질리게 되는 건데, 그래도 '한참 지난 다음에 다시 들으면 참 좋다'라고 생각되는 음악은 있잖아요? 그런 부분은 시작할 때부터 음악 속에 담겨지는 것 같아요. 유행음악들이 그렇게 많이 들리고, 한동안 정말 불티나게 팔리다가도 숨이 탁 끊어지는 게 다 그런 이유인 것 같고... 그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저 자신이 그렇게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요.

Q: 하나음악의 다른 식구들에 대해서도 몇 개만 물어보겠습니다. 오소영님 음반 같은 경우 오히려 더 옛날 분위기로 갔잖아요?
- (오)소영이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하는 게 (오)소영이의 음악을 풀어가는 방법으로 가장 좋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었어요. 시간에 쫓겨서 한 것도 아니었고. 첫 앨범의 경우 자기의 의사가 들어가기 힘든데 (오)소영의 경우 참여가 되는 편이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곡을 쓰고, 기타도 직접 치고 하니까.

Q: 근거없는 억측이지만 (오)소영 님은 조금 새로운 편곡이나 사운드를 바랬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로 가야 한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 조동익 씨가 음반의 프로듀서라고 해서 모든 걸 독단적으로 하는 적은 없어요. 맘에 들든 안 들든 한번 해 보고, 그걸 음반의 주인이 들어 보고 '난 이게 좀 아닌데...'라는 반응을 보이면 조동익 씨는 그냥 지우는 사람이니까. 서로 컨셉, 생각, 마인드가 맞기 때문이지 개입이나 그런 건 아니죠. 중요한 거는 믿어주는 거구요, 서로 신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Q: 그 전에 오소영 님이나 이다오 님같은 사람들이 하나음악에 합류하게 된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가요?
- (오)소영이 같은 경우엔 데모를 받았고, (이)다오도 데모를 보냈죠 (이)다오 같은 경우는 김정렬 씨가 사무실 일찍 나와서 연습하다가 우연히 한번 들어보고 조동익 씨한테 얘기를 한 거죠. (이)한철이 경우는 (윤)영배를 통해서 알게 됐는데, 그 친구는 하나음악과 직접적인 작업을 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냥 넓게 봤을 때 서로 관계가 걸쳐 있는 거죠.

Q: 보통 한영애, 장필순, 이상은을 대중음악계 여성 아티스트 혹은 여성 스타일리스트로 꼽습니다. 다른 두 분에 대한 견해를 물어봐도 될까요?
- 글쎄요... 미안하게도 이상은 씨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라요. 많이 알려졌고, 앨범마다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그랬더군요. 그런데 제가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질 못해서 별로 해 드릴 말이 없네요. (한)영애 언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알았던 사람이죠. 동아기획에 저보다 먼저 들어가셨으니까 그때부터 알았죠. 며칠 전에 우연히 케이블 TV를 보았는데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나오더군요. 이번에 트로트 앨범을 했다고... 언니야 자기 나름대로 개성이 있으니까... 영애 언니 같은 경우야 곡도 쓰고 가사도 쓰지만 '진짜 가수'라는 느낌이 들어요. 노래 참 잘하는 여자. 자기 개성이 강한 여자. 저는 그렇지는 못하죠.

Q: 앞으로 활동 계획 같은 것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 특별한 건 없고, 좋은 공연 또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내년에 조동진 선배님이 공연을 한번 할 것 같거든요. 셀 기획의 (엄)세범 씨가 계속 건의하고 계시는데, 잘 모르겠네요

Q: 관련해서 지난 예술의 전당 공연도 그렇고, 하나음악 식구들의 공연을 맡는 셀 기획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 셀 기획이 특별히 하나음악하고만 공연 기획을 하는 건 아니지만 거기 대표인 엄세범 씨가 조동진 선배랑 친분이 있죠. 원래는 조명 회사였거든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공연과 음반의 기획을 맡았는데 제가 알게 된 건 조동진 선배의 1994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공연부터예요. 그 뒤 199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연합 콘서트였던 [꿈의 작업]이나 2000년 겨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의 공연에서 계속 기획을 맡았죠.

Q: 전번에 (조)동익 님 인터뷰에서 한 말이지만 그 양반은 왜 공연을 안 하려고 하죠? 무대에 서서 노래 좀 불러 보라고 주위에서 해 보시면 어떨까요?(^^)
-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무대 체질이 있는 것 같고, 무대 뒤에 있는 체질이 있는 것 같고. 조동익 씨는 성격은 굉장히 남자다운데, 나서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후배들한테 굉장히 크게 자리잡고 있는데, 앞에 나서서 지휘하고 이러는 건 별로 안 하려고 해요. 뭐... 결국엔 그렇게 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어디 가서 프로듀서를 하는 경우에도 제작자랑 부딪히는 일들을 힘들어하더라구요. 낯선 분위기에 쉽게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색깔이겠죠?

Q: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줘서 감사합니다. 곧 멋진 공연 다시 보게 되기 바랍니다. 200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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