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우리 선조들을 일컬을 때 호를 사용하면 존칭을 생략하여도 큰 흠이 안된다]이 43 세의 나이에 벼슬 없이 부담 없는 상태로 중국에 보내는 사신 일행과 같이 북경과 숭덕(열하)을 다녀오면서 모든 일을 적은 일기이다. 이 사신의 목적은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 세 생일 축하였다.
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경제력이 높고, 평화를 이룬 시기였다. 이런 융성한 중국을 청나라가 발생한 지역 근처에서 시작하여 청나라의 수도까지 가면서, 그 당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도 최고의 지성(知性)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연암이 보고 느낀 바를 매일 상세히 적은 것이다.
나는 아직 이렇게 정확하고, 지성적이며, 논리적이면서 역사적인 면까지 모두 분석한 기행문을 본 적이 없다. 현대의 여러 사람의 기행문을 보면서 한결같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열하일기를 읽고 여러 가지를 배운 반대급부일 것이다.
[박지원 朴趾源 1737~1805(영조 13~순조 5) 백과사전에서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본관은 반남(潘南). 서울 출생.
16세에 처삼촌인 영목당(榮木堂) 이양천(李亮天)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보이게 되었으며, 30대에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박제가(朴齊家)·홍대용(洪大容)·유득공(柳得恭) 등과 사귀었다.
과거(科擧)에의 뜻을 버린 채로 곤궁한 생활 속에서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팔촌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임금의 사위)이 청(淸)나라의 진하사절(進賀使節)로 베이징〔北京〕에 갈 때, 사행(使行)을 따라 중국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돌아보게 됐고 이때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연행(燕行)을 계기로 하여 충(忠)·효(孝)·열(烈) 등과 같은 인륜적인 것이 지배적이던 전통적 조선사회의 가치체계로부터 실학(實學), 즉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물질적인 면으로 가치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연행 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어 이용이 있은 다음에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 도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이 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출발할 때부터 이미 이용, 후생의 개념을 완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86년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어 늦게 관직에 들어서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면천군수(沔川郡守) 등을 거쳐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문장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정아(精雅)한 이현보(李賢輔)의 문장과 웅혼(雄渾)한 그의 문장은 조선시대 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희화(戱畵)·풍자(諷刺)의 수법과 수필체의 문장들은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호질(虎叱)》[임성삼의 주; 이것은 열하일기 내에 포함되어 있다.]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10년(순종 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도공(文度公).]
[열하는 승덕(承德)의 옛 이름이다. 백과사전에서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에 있는 도시.
현급(縣及) 시이며 청더 지구의 행정중심지이다. 화베이 평원[華北平原]을 내몽골 고원과 갈라놓는 산지 가운데 있으며, 베이징[北京]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180㎞ 떨어져 있다. 또 롼허 강[河]의 작은 지류인 러허 강[熱河]에 면해 있다. '뜨거운 강'이란 뜻의 러허 강은 승덕 위쪽에서 이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개의 온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강의 이름이 도시에 붙여졌고 이 도시를 성도(省都)로 삼은 성에도 붙여졌었다.
만리장성에서 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지역은 비교적 근세까지 비(非)한족 후예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중국 본토의 일부가 된 것은 요(遼:907~1125)나라 때로 당시 이곳은 북안주(北安州)에 속한 흥화현(興華縣)의 현청 소재지였다. 금(金)나라 때인 12세기에 흥화현은 흥주(興州)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 이름은 원대(元代:1279~1368)에도 계속 쓰였다. 원제국의 몰락과 함께 만리장성 바깥 지역에서의 중국의 권위도 쇠퇴했다.
1700 연대 초(初) 청(淸:1644~1911/12)의 강희제(康熙帝)는 이곳에 여름 관저를 짓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뒤 황제가 매년 여름에 베이징을 떠나 숭덕에 머무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에 숭덕 주변지역은 만리장성 바깥 지역 중 맨 먼저 집중적으로 개척되고 경작되었다. 숭덕 자체는 번창하는 도시로 성장하여 1729년 러허 청(廳)이 되었으며 1733년에는 숭덕 주가 되었다. 청대에는 몽골의 봉신(封臣)들이 매년 대향연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며, 황제는 외국사절단을 영접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매카트니 백작이 이끄는 영국 사절단도 1793년 이곳에서 영접받았다.
숭덕에는 지름이 8㎞나 되는 경내에 세워진 궁전 건물 외에도 화려한 티베트 불교 사원과 작은 사찰 및 사당이 수없이 많다. 그중 가장 큰 2곳을 꼽는다면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티베트] 라싸[拉薩]에 있는 포탈라 궁전을 본떠 지은 사원과, 시짱 자치구의 르카쩌[日喀則]에 있는 타시륀포 사원을 모방한 것이다.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궁전과 사원들은 여행자의 발길을 끄는 주요관광지이다. 1742년 이 도시는 러허 청의 관공서 소재지가 되었으며 1778년에는 청더 부(府)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허베이의 옛 이름인 직례성(直隸省)의 일부였다. 1821년 이후 여름마다 청더로 오던 황실의 행차가 점차 뜸해졌다. 19세기말 내몽골과의 경계지역에서 중국인 정착 금지령이 완화되자 중국인의 이주가 급증했다.
인구 246,799(1990).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참고로 1600 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유명한 사람들을 적는다.
Isaac Newton 1642.12.25~1727.3.20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7.1~1716.11.14
Handel
, Georg Friedrich 1685.2.23~1759.4.19
Johann Sebastian Bach 1685.3.21~1750.7.28
Montesquieu, Baron de La Bre de et de/Secondat, Charles-Louis de
1689.1.18~1755.2.10
朴文秀 1691~1756 암행어사, 우리나라의 첫 가계부, 첫 장에 - 백성들이 흉년으로 배를 곯고 있다. 한 푼을 줄여 쓸 일이다
英祖 1694~1776 재위 1724~76
Voltaire 본명은 Francois-Marie Arouet. 1694. 11. 21~1778. 5. 30
1700
B. Franklin 1706-1790
Carl von Linnaeus 1707~1778 스웨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수 만큼의 종이 존재한다.
L. Euler 1707-1783
安鼎福 1712~1791
Jean-Jacques Rousseau 1712.6.28~1778.7.2
홍대용 洪大容 1731(영조 7) 서울~1783(정조 7).
George Washington 1732∼1799
하이든, 프란츠 요셉 1732 - 1809
연암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볼타 Volta 1745-1827 이탈리아
Charles, Jacques Alexandre Cesar 1746.11.12~1823.4.7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8.28~1832.3.22
박제가 1750-?
정조 正祖 1752∼1800(영조 28∼정조 24)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27~1791.12.5
John Dalton 1766.9.6~1844.7.27
Napoleon I 1769.8.15~1821.5.5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
Amedeo Avogadro 1776.6.9~1856.7.9
Joseph Louis Gay-Lussac 1778.12.6~1850.5.9
베버, 카를 마리아 폰 1786 - 1826
Michael Faraday 1791∼1867
롯시니 1792 - 1848 세빌랴의 이발사
Franz Peter Schubert 1797.1.31~1828.11.19
도강록(渡江錄)
[역주(譯註); 압록강으로부터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15일의 기록]
도강록(渡江錄) 서
무엇 때문에 <후(後) 삼경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 무엇 때문에 <후(後)>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三) 경자(庚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명나라는 중화(中華)이고,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숭정 17 년에 의종 열황제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지 벌뻐 1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 천리는 강(江)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光復)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 년 계묘에 <열상외사> 쓰다.
후 삼경자는 곧 우리 성상(정조(正祖)) 4 년이다. [1780 년]
[임성삼의 주(註); 여기는 여러 가지 주를 달아야 한다.
첫째로 현재는 각 나라마다 시간을 재는 기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일본은 자기 나라의 왕을 기준으로 하고, 회교도는 헤지라(612 년)을 기준으로 한 연도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나의 초등학교 초반까지는 단기를 사용하였다.
과거 중국에서는 주위의 나라가 자기의 우호적 국가인지의 여부를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가로 판단하였다. 현재는 중국까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력기원을 사용한다. 그러나 과거 수천 년간 주위의 국가가 중국과 다른 연호를 사용할 경우 중국의 군사적인 침략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독립 연호는 조선조의 고종 말엽에 광무가 존재했을 뿐이다. 광무의 연호를 사용하는 기간[1897-1907]만은 우리 고종을 황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 청의 침략으로 공식적인 항복을 한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공식적인 서류를 제외하고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서울 주위의 왕릉의 비석에 적혀 있는 연호를 살펴보기 바란다.
단종 임금의 유배지인 영월 근처의 청룡포에 있는 숙종(1661∼1720) 시대에 마련한 비석에도 숭정 99(? 정확한 햇수는 여러분이 그 곳에 가서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년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서울 근교 일산의 서삼릉의 항상 잠겨져 있는 비각 중 하나의 뒤쪽에서 키 큰 사람이 자세히 보면 숭정 일백구십 몇 년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행동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이 '모화사상(慕華思想)'만으로 인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서울 근교의 서삼릉에 조차 비석으로 물질적인 증거를 남겨놓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동양 문화의 정수(精髓)를 지속시키고 있으며, 중국은 이미 망했다는 자부심이 있지 않고는 이렇게 계속하여 모든 돌에 물적증거를 남겨놓았을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청에 반대하는 명나라 후예에 의한 지방 정권이 여러번 성립되었었다. 그 정권들이 사용하였던 연호는 우리와는 달리 처음으로 청나라에 반기를 든 명나라의 후예가 만든 지방 정권의 연호를 사용하였었다.]
6 월 24 일 [이 열하일기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가는 날에 시작된다.]
... 황여고[명(明)나라 장천성이 지은 지리(地理) 책]에는,
"천하에는 큰 물이 셋 있으니,
황하와 장강(長江; 양자강)과 압록강이다." 하였다.
[임성삼의 주; 내가 어릴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선생님들이 항상 "우리 나라에는 큰 강이 없고, 큰 산이 없어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하여 상당히 사기가 저하되었었다. 그러나 앞의 책 소개에서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중국 대륙에서 높다는 네 개의 산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태산 1542 m, 화산 2200 m, 숭산 1688 m, 항산 2219 m
모두 우리나라의 여러 산 보다 낮다. 백두산 2744 m은 예외로 하여도 우리가 이름을 잘 모르는 산들도 2000 m를 넘는 것이 함경 남북도에서 적어도 열 개 근처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동양의 큰 강 중 압록강이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유럽에 가서도 크고, 긴 강을 유심히 살폈으나그 곳에는 크고, 긴 강이 별로 없다.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 미국의 넓은 땅을 말하면서, 그 넓은 땅으로 인하여 미국은 전혀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유지할 것으로 말하는 경우를 본다. 물론 넓은 땅은 큰 강이나, 높은 산보다 더 유용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역사가 넓은 평야를 가진 나라만이 세계를 오랜 기간 지배한다는 법칙을 보여준 적은 없다. (물론 역사가 항상 예외를 보여주기는 한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帝國)을 이 지구 위에 건설한 영국은 가장 높은 산이 1343 m에 불과하고(벤네비스 산, Ben Nevis; 스코틀랜드 서부), 긴 강도 없으며, 넓은 평야도 없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것은 영국사람 힐러리(Hillary)였다. 또한 남극점도 영국 사람인 스코트가 아문젠보다 며칠 늦게 두 번째로 정복했다.]
<양산묵담>에는
"회수 이북은 북조(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 황하로 모여들어 강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한다." 하였으니, 대체 이 압록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지금 한창 가뭄인지, 장마인지 천리 밖이라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P 196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주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쫑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마부 창대는 앞에서 경마 잡고, 하인 장복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비록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P 197
옛날에 형경이 바야흐로 역수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 한 사람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어늘"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 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제적인 인물이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를 끼고 적국인 진나라에 들어가려면 도와줄 사람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요.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으로 애로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했으니, 그 <멀리>라는 말은 참 교묘한 칭탁이다. ...
[임성삼의 주(註); 위의 이야기는 사기열전 중의 자객열전에 실려있는 5 명의 자객 중 제일 마지막인 형가에 대한 것이다. 형가에 대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여서 연암은 아무런 설명없이 시작한다. 즉 "옛날에 형경이 바야흐로 역수를 건너려 할 제..."
이미 소개한 사기열전을 읽은 사람은 다시 형가에 대한 부분을 읽고 연암이 말한 내용을 이해하도록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훗날 이등박문을 저격하기 전 날 안중근 의사의 마음도 한 번 생각해 보고.] ...
[사신(使臣) 일행의 진행 광경을 보면서]
(연암의 삼종제(三從弟)인)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임성삼의 주(註); 보통 조선 중기 이후에는 관리들이 모두 부패한 것 같이 생각하도록 우리의 TV의 사극(史劇) 작가들이 만들고 있으나 내가 읽은 책에서는 오히려 관리들의 검소한 부분이 더 많이 나온다. 그 당시 연암 박지원은 가난하고 벼슬없는 선비여서 실제로 국가 체제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열하일기에 관리의 부정부패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위와 같이 지나치게 검소한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p 200 [압록강 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세관 검사를 한다. 세 번을 검사하는 데] 금물(禁物)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서 걸린 자는 중곤(重棍); 대곤(大棍)보다도 더 큰 곤장)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을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임성삼의 주(註); 과거 조선시대의 법률은 상당히 엄하였고 법의 집행도 상당히 엄격하였다. 앞으로 시간이 있으면 이런 개념으로 '이조 실록'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률에서는 다음의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관리로 있으면서 계속 뇌물을 받은 사람이 위에 뇌물을 주어 진급하고, 이 사실이 밝혀지면 재판에 회부되더라도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하였다는 구실로 아주 경미한 벌을 받고 그동안 받은 뇌물 중 극히 일부만 환수당한다. 이런 법 체계를 가지고 부정 부패를 막으려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날 압록강을 넘어 애랄하도 건넌다.]
이 애랄하의 넓이는 우리 임진강과 비슷하다.
6 월 25 일(둘째 날)
마부 중에 술을 가지고 온 자가 있어서 아는 사람이 한 병을 사서 바친다. 드디어 서로 이끌고 시냇가에서 잔을 기울인다. 강을 건넌 뒤로 조선 술은 아주 단념하다가, 이제 별안간 이 술을 얻고 본즉, 술 맛이 몹시 아름다울뿐더러 한가히 시냇가에 앉아 마시니 그 멋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방물이 미처 대어오지 못하였으므로 또 구련성에서 노숙하다.
6 월 26 일(셋째 날)
[명나라 장수 강세작이 이 근처에서 청나라와 싸우던 이야기, 또 그 싸움에서 항복한 우리나라의 도원수 강홍립의 이야기도 약간 나온다.]
6 월 27 일(4 일째)
아침 일찍 떠났다. 길에서 되놈 5, 6 명을 만났는데, 모두 조그만 당나귀를 타고, 벙거지나 옷이 남루하며 얼굴이 지친 듯 파리하다. 이들은 모두 봉황성의 갑군(甲軍)으로 애랄하에 수자리를 살러 가는데, 대부분 삯에 팔려 가는 자 들이라 한다. 이 일을 보고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염려할 것 없으나, 중국의 변비(邊備; 변방의 방비)는 너무나 허술하다고 느꼈다.
[임성삼의 주(註); 우리 개념에 조선 중기 이후의 우리나라 국방(國防)이 별로 완전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소설 작가의 견해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당시 사셨던 연암의 위의 말씀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직전의 우리 국방 상황도 진주성을 새로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완벽을 기하려 하였다고 한다.
침략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비를 한 경우는 전 세계의 전쟁사를 보아도 별로 없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군대를 거느린 신립 장군의 전투 방식이 상당히 안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주력군의 패퇴가 전체적인 전세에 영향을 미쳐 전체적인 후퇴를 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08
멀리 봉황산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 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 난 듯도 하고, 하늘가에 여름 구름의 기이한 변화 형태나 아름다운 자세와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맑고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
내가 일찍이 우리 서울의 도봉산과 삼각산[임주(任註); 북한산을 흔히 삼각산이라 불렀다. 해발 837 m]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그 동부(東部)를 엿보면 이른바 1만 2천 봉이 그 어느 것이나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깊지 않음이 없어서, 짐승이 끄는 듯, 새가 날아 다니는 듯, 음랭(陰冷)하고 그윽함이 마치 귀신의 굴 속에 들어간 것 같다. 내 일찍이 신원발[사람 이름]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일이 있다.
때마침 가없이 파란 가을 하늘에 석양이 비꼈으나, 다만 창공에 닿을 듯한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가 없음을 느낀 나는 미상불 금강산을 위해서 한번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배를 타고 상류(上流)에서 저어 내려오면서 두미강(頭尾江) 어귀에서 서쪽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삼각산의 모든 봉우리가 깎은 듯 파랗게 하늘에 솟구쳤다. 엷은 내와 짙은 구름 속에 밝고 곱게 아리따운 자태가 나타나고, 또 일찍이 남한산성의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 거울 속의 달과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목의 윤기나는 기운이 공중에 어림은 왕기(旺氣; 성할 왕, 기운 기)라고 하였으니, 왕기(旺氣)는 곧 왕기(王氣)인즉, 이는 우리 서울은 실로 억만년을 누릴 용이 설레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였으니, 그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야말로 의당히 범상한 산세와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봉황산 형세의 기이하고 뾰족하고 높고 빼어남이 비록 도봉, 삼각산보다 지나침이 있건마는, 어린 빛깔은 한양의 모든 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문장에 대하여는 조선일보의 '이규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읽고 이야기 한 것 같다. 나는 이것을 사람에 비교하여 말하고 싶다. 사람도 금강산이나 봉황산과 같은 아름답고 빼어난 사람이 있을 것이나, 삼각산 같이 변화가 있으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사람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삼각산의 연봉(連峰)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일산(一山)에서 서울로 향하는 자유로를 거쳐 학교에 출근하며 아침 햇살에 비친 삼각산을 보면 연암(燕巖)이 말한 내용을 마음속에서 느낄 수 있다. 산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면에서 보는 것과 옆에서 보는 모습에 차이가 있다. 서울의 주산(主山)인 삼각산은 정면인 남산에서 보아도 매우 좋은 산이다. 너무 높아 사람을 내리 누르지 않으며, 주위에 위압되어 자기를 나타내지 못하는 일도 없다. 또한 동쪽의 수유리에서 보아도 범이 조용히 쉬고 있는 자세와 같은 안정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산 부근의 넓은 벌과 강에서 보는 삼각산의 연봉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연암이 느낀 방향과는 거의 대칭되는 곳에서 보는 것이지만 내가 보는 곳에서 느끼는 서기(瑞氣)는 두미산 어귀에서 보는 광경과, 남한산성에서 보는 광경에 못지 않는 장엄함과 맑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올해들어 어떤 사람이 매스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좋은 삼각산을 두고 비싼 돈을 내고 금강산 구경을 가는 것'에 대해 매도(罵倒; 욕할 매, 넘어질 도)하지 말자. 금강산은 금강산이요 삼각산은 삼각산이다. 금강산도 보고 백두산도 가 보아야 한다. 가능하면 중국의 역사가 어린 여러 산들도 돌아보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
산(山)을 논(論)하고 찾아감은 그 모습만 보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을 기르기 위함이다. 연암이 삼각산을 봉황산과 비교함이 눈에 보이는 형태만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암이 짧은 기간에 느낀 그 곳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적(知的)인 그리고 정서적인 능력을 비교한 것이 아닐까? 결국 청나라는 이 시기부터 계속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무궁화처럼 겨울을 제외하고 계속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원래의 이야기에 복귀한다.]
말을 빨리 몰아 7, 8 리를 가서 책문 밖에 닿았다. ...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았다. ... 네 거리가 쪽 곧아서 양쪽 거리가 마치 먹줄친 것과 같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을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며 벌여 놓은 기명(器皿; 그릇 기, 그릇 명) 들은 모두 그림 그린 자기이다. 그 제도가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앞서 나의 벗 홍덕보가
"그 규모는 크되, 그 심법(心法)은 세밀하다."
고 충고하더니, 이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앞으로 더욱 변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이어서 여기서 그만 발을 돌릴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해진다.
[임성삼의 주(註); 위에 내가 말한 사람들과 연암을 기본 개념이 얼마나 다른가? 물론 이 때의 청나라를 우리 선조님들께서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나라이기는 하다. 큰 규모에 세밀한 심법을 가지면 야만인이라도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개념을 곧 연암이 가지게 된다.]
[책문에서의 여러 행정적인 일이 나온다. 연암과 다른 두 사람은 술 집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술을 무게로 파는 것을 처음 본다.]
탁자 위에 벌여 놓은 술잔이 한 냥으로부터 열 냥까지 제각기 그 그릇이 다르다. 모두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어서 빛깔을 내어 은과 같다. 넉 냥 술을 청하면 넉 냥들이 잔으로 부어 준다. 술을 사는 이는 그 많고 적음을 계교할 필요가 없다. 대체 그 간편함이 이와 같다. 술을 모두 백소로[흰 소주]인데, 맛이 그리 좋지 못하고 취하자 이내 깬다.
그 주위를 보니, 모든 것이 고르고 단정하여 한 물건이라도 아무데나 어지럽게 놓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제 곳에 놓였으니 나무더미나 거름 무더기까지도 유달리 깨끗하고 맵시 있는 품이 그린 듯싶다. 아아! 이런 연후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厚生)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대체로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모든 물건은 잘 정돈되어 있다. 이 시기가 중국의 전성기였다. 이 후 150 년이 지나 서양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한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의 중국이 서양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
점심 뒤에, 내원과 정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 7 리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 속에는 안시성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성싶고, 오직 정남의 한쪽이 좀 편평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아서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때의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아닐 테니, 이는 아마 고구려의 조그만 보루가 있었던가 싶다.
6 월 28 일(5 일째)
중국사람들에게는 이른바, <글 외기>와 <강의하는 것>의 두 길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겸해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처음 배우는 이는 그저 <사서(四書)>의 장구(章句)만 배우는 것을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하지 못하였더라도 입으로 익힌 장구가 곧 날로 상용하는 관화(官話)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말이 가장 쉽다는 것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임성삼의 주(註); "사서의 장구(章句)만 외는 것을 <글 외기>라고 한다"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고전을 배우는 독특한 방법이다. 넓은 나라의 많은 사투리를 통합하기 위해 성립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표준 발음으로 일단 문장 전체를 자세한 의미를 모르면서 외고, 나중에 뜻을 알려주는 방법인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줄 친 부분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이다. 천재로 소문난 연암이 우리 한글을 끝내 배우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한문을 가장 쉽게 생각하셨으니 우리 한글의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우셨을런지 모른다.]
...
대체 집을 세움에는 반드시 수백 보의 자리를 마련하여 길이나 넓이를 알맞게 하고 사면을 반듯하게 깎아서 측량기로 높고 낮음을 재고, 나침반으로 방위를 잡은 연후에 대를 쌓되, 터전은 돌을 깔고 그 위에 한층 또는 두세 층 벽돌을 놓으며, 다시 돌을 다듬어서 빈지[?]를 쌓는다. 그 위에 집을 세우되, 모두 한일자로 하여 구부러지게 하거나 잇달아 붙여 짓지 않는다. 첫째가 내실이요, 그 다음이 중당, 셋째는 전당, 넷째는 외실이다. 외실 밖은 한길이라 점방이나 또는 시전으로 사용한다. ... 반드시 앞뒤가 꼭 맞서게 하였으므로 집이 서너 겹이라면 문은 여섯이나 또는 여덟 겹이나 되어도 활짝 열어 젖히면 안채로부터 바깥채에 이르기까지 문이 똑바로 화살같이 곧다. 그들이 이른바,
"저 겹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 통하게 하누나."
함은, 그 곧고 바름을 이에 견준 말이다.
길에서 이역관(譯官)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궁벽한 시골 구석에 무어 볼 만한 게 있겠어요."
하기에 나는
"연경인들 이보다 더 나을 수 있을라고"
하였더니 이군은
"그렇습니다. 비록 크고 작으며 사치하고 검박한 구별은 있겠지만, 그 규모는 거의 한가집니다."
한다.
[임성삼의 주(註); 외국에 입국한 지 5 일만에 집 세우는 방법에 대해 논하셨다. 내가 많이 생략하였으나 자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중국 변경의 첫 도시를 보고 크게 놀라시면서도,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도 크게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결론지으셨다.]
대체 집을 지음에 있어서 온통 벽돌만을 사용한다. 벽돌의 길이는 한자, 넓이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고 두께는 두 치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는 광해군 때 만든 척관법인 한자 31.07 cm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 개의 네모진 벽돌 박이에서 찍어 낸 벽돌이건마는 귀가 떨어진 것도 못 쓰고 모가 이지러진 것도 못 쓰며 바탕이 비뚜러진 것도 못쓴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를 어기면 그 집 전체가 틀리고 만다. 그러므로 같은 기계로 찍어냈건마는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염려하여, 반드시 곡척(曲尺; ㄱ자 자)으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힘써 가지런히 하여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듯 싶다.
그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이기어 붙이되, 초지장처럼 엷으니 이는 겨우 둘 사이가 붙을 정도여서 그 흔적이 실밥 같아 보인다. 회를 이기는 방법은 굵은 모래도 섞지 않고 진흙도 사용하지 않는다. 모래가 굵으면 어울리지 않고 흙이 진하면 처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검고도 부드러운 흙을 회와 섞어 이기어 그 빛깔이 거무스름 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기와와 같다. 대체 그 특성은 진흙도 쓰지 않고 모래도 쓰지 않으며 또 그 빛깔이 순수함을 취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어저귀(삼의 일종) 따위를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다. 이는 우리나라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으니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함이요, 또 동백기름을 타서 젖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하여 떨어지고 터지는 탈을 막는다.
[임성삼의 주(註); 공학적인 사실을 설명하면서도 이렇게 세밀하고 알기쉽게 적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모래와 흙을 섞지 않는 것, 가는 섬유를 섞는 것 등은 이해가 가나, 동백기름을 회에 타면 접착력이 저하되지 않을 지 의심이 간다.]
[그 다음에 기와를 이는 법이 이어진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방법을 비교하여 우리의 방법을 비판한다. 잘 읽어보기 바란다.]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 눈가는 곳마다 번듯번듯하게 바둑판을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여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염려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 쥐, 뱀, 고양이 같은 놈들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안의 모든 물건을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원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성삼의 주(註); 벽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계속된다. 이 당시의 중국의 건축술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수준이었다. 이 해가 1780 년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벽돌을 사용하여 수원성을 축성(築城)하기 시작한 것이 1794 년 2 월이다. 완공은 1796 년 9 월이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혹은,
"이 성이 곧 안시성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한새]>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백암(白巖)]>이라고 함을 보아서,
"수, 당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蛇)성을 백암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 성주 양만춘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자기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하다 하였다."한다. 그러므로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효종 4∼경종 2))이 그 아우 김창업을 연경(燕京)으로 보내는 시에
千秋大膽楊萬春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箭射筮[오른쪽에 ]髥落眸子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라 하였고, 목은 이공 색의 정관음에
爲是囊中一物爾,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 것 없다더니
那知玄花落白羽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라. 이 두 늙으신 이가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임성삼의 주(註); 7 번째 책 소개, 사가 서거정의 필원잡기에서 소개한 시이다. 아래의 내용과 더불어 이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기는 사가 선생이나 연암이나 동일한 개념이다. 즉 우리나라가 무력적(武力的)으로도 강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자는 의도이다. 그러나 만일 부상당한 사람이 중국에서 가장 용감하며, 전쟁을 잘 이끌었던 황제인 당태종이 아니었으면 이 두 분이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한 작은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았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고 보니, 대체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778∼865, 당의 학자]의 소설을 끌어 와서 당태종의 피위된 사실을 입증까지 했으나, 다만 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기록되지 않았은즉,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위하여 기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 김부식을 비판하는 것도 사가 서거정과 연암이 동일하다.]
나는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 한다 하였다. '지지(地誌)'에, 봉황성은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으로 이름함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地誌)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봉천부에 속하는 지명)의 동북 70 리에 있다 하였으니,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가 3 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안시성의 위치를 논하였다.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러나 요즈음 재야 역사가의 논리가 연암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재야 역사가의 글에서 이 열하일기가 언급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그쪽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하였을지 모르나...]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다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 예, 맥 등 동이
(東彛, 떳떳할 이, 영구히 변하지 아니하는 도; [역주(譯註); 어떤 본에는 동이(東夷)라고 되어 있으나 그릇된 것이다. 연암은 우리나라는 야만족이 아니라고 하여 이 이(彛)자를 사용하였다.])
의 여러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자, 영고탑, 후춘 등이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연암이 제안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사적인 사실을 말할 때 부득이 동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동이(東彛)라고 적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한자는 약간 어렵지만.]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아니하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浿水, 강이름 패)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을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을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중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에 현토나 낙랑은 있으나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위의 논리들을 처음으로 주장한 분이 연암이라면 연암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하고, 연암 전에 주장한 분이 있으면 그 분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재야(在野) 사학(史學)하시는 분들이 이 공을 가로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후에도 두 쪽에 걸쳐 자세한 역사적인 고증이 나온다. 이어지는 것은 봉황성을 짓는 모습이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되 현실을 자세히 관찰하고 실제로 이용할 것을 생각하시는 것이 연암의 장점이다.]
봉황성의 둘레는 3 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모가 반듯하여 모말을 놓은 듯싶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을 위로부터 끌어 올리기도 하며, 혹을 저절로 밀기도 하고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가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기중기와 여러 수레의 사용을 말하는 듯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로부터 14 년 후에 수원성을 축성할 때 기중기를 사용하였는데 누가 배워왔을까? 적어도 이 열하일기가 배워오는데 기여를 한 것이 아닐까?]
길을 떠난다. 정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다. 나는 정진사에게,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정진사는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아."
하고 답한다. 나는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임성삼의 주(註); 나는 이 책에서 연암의 말에 거의 다 승복한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한 마디를 하려 한다. 위의 말 즉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로 논의를 시작하면 상대방을 설복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없다. 이러한 표현은 내가 아무리 옳더라도 대화로 남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에 소개한 '프랭클린의 자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우리나라의 성벽에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체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벽돌박이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 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수고도 없을 게 아닌가. 벽돌을 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이 벽돌만한 게 없네.
이제 돌로 말하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에 몇 명의 석수를 써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 내기까지에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덕을 깎아 내고 돌을 입히니, 이야말로 흙의 상에 돌옷을 입혀 놓은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뻔질하나 속은 실로 언틀먼틀하는 법일세. 돌은 워낙 득쑥날쑥하여 고르지 못한 것인즉 조약돌로 그 궁둥이와 발등을 괴며, 언덕과 성의 사이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므로, 장마를 한 번 치르면 속이 궁글고 배가 불러져서, 돌 한 개가 튀어나 빠지면 그 나머지는 모두 다투어 무너질 것은 빤히 뵈는 이치요, 또 석회의 성질이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것일세.
내가 일찍이 성에 박제가와 더불어 성에 대해 논할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박제가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것이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말함이오?'
하던데 그려.
이는 가위 철(鐵)과 같은 이론일세.
대체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게되며, 많이 쓰면 쓸수록 석회는 더 터져 버리며, 돌을 배치하고 들떠 일어나는 까닭에 돌은 항상 외톨로 돌아서 겨우 흙과 겨루고 있을 따름이네.
벽돌은 석회로 이어 놓으면 마치 아교가 나무에 합하는 것과 붕사가 쇠에 닿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뭉치로 엉켜져 굳은 성을 이룩하므로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 비길 수 없겠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도 만 개의 굳음만 같지 못할지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겠지."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우리는 위의 글에서 자기의 기술(技術)적인 논리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 정도로 조리있게 자기의 이론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는 동일 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설명하며 논리와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기술의 단점을 잘 알게 되며 그것을 보완할 방법을 찾게 된다.]
정진사는 말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잠든 지 오래 된 모양이다.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원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고 꾸짖으니, 정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을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
한다. 나는 하도 부아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임성삼의 주(註); 공학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한 결과는 대개 위와 같다.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것이나, 기괴한 것을 이야기하면 관심을 가지고 잘 들으나 논리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는 집중하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위와 같이 크게 웃고 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도하까지 5 리에 하나씩 돈대가 있다. 이른바 봉화대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동그랗기가 마치 필통 같다. 대 위에는 성첩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는 무적(無敵)의 청나라가 이미 국방에 유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산이 없고 평야가 계속되는 지역이므로 2 km에 봉화대 하나씩을 만들었다고 본다.]
[위의 5 일째의 글은 분량이 많다. 그것도 길을 가며 저녁에만 쓰신 것이다.]
29 일(6 일째)
... 5 리나 10 리마다 마을이 즐비하고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졌으며, 때마침 올기장이 누렇게 익었고, 옥수수 이삭이 한창 패났는데 ....
이르는 곳마다 관제묘(關帝廟)가 있고 몇 집만 보면 반드시 한 채의 큰 우리가 있어 벽돌을 굽게 되어 있다.
[전당포의 내용을 말하고 전당포에 달려있는 주련(柱聯)을 적었다.]
大學十章半論財 '대학'의 10 장에도 반은 재물을 논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사서(四書) 중의 '대학'을 이미 소개하였으니 위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바란다.]
이 날 50 리를 행하여 통원보에서 묵다.
7 월 1 일(7 일째)
새벽에 큰 비가 내려 떠나지 못하다. [다른 사람들은 노름을 하였으나 연암은 서툴다고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 몫 넣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고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분하긴 하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을 하고 술을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지 않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은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絶世)의 가인(佳人)이리라."
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 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셔요"
하기에 답을 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 쪽지에는 온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 촘촘히 은단추를 끼었고, 발엔 풀, 꽃, 벌, 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꿰었다. ...
[임성삼의 주(註); 이 시대가 청나라의 융성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로 보면 주막 여주인의 몸차림이 대단하다.]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온다. ... 생김새는 역시 억세고 사나우나 다만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쇠양푼을 갖고 와서 퍼런 질그릇을 기울여 수수밥 한 사발을 수북하게 퍼담고 양푼의 물을 부어서 서쪽 아래 놓여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잎사귀째 장에 찍어서 밥과 번갈아 씹어 먹는다. 목에는 달걀만한 혹이 달렸다.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다.
[임성삼의 주(註); 옷은 화려하나 이 시기까지 먹는 것은 청나라 초기와 같이 검소함을 알 수 있다. 청나라는 이 시기 이후 100 년 이상 지속된다.]
닭은 모두 꼬리와 깃을 뽑고 두 겨드랑 밑의 털까지도 뜯어 버리어 고기 덩이만 남은 닭이 기우뚱거리면서 다닌다. 이는 빨리 키우는 방법이요, 또 이가 생기는 것을 예방함이다. ... 꼴이 하도 추악해서 바로 볼 수가 없다.
7 월 2 일(8 일째)
새벽에 큰 비가 내리다. 앞 시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으므로 떠나지 못하다. ...
오후에 문을 나와서 바람을 쐬다. 수수밭 가운데서 별안간 새총 소리가 난다. 주인이 급히 나와 본다. 밭 속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한 손에 총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돼지 뒷다리를 끌고 나와 주인을 흘겨 보고,
"왜, 이 짐승을 내놓아서 밭에 들여 보낸담."
하고 노한 음성을 낸다. 주인은 다만 송구한 기색으로 공손히 사과하여 마지 않는다. 그 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끌고 가 버린다. 주인은 자못 섭섭한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거듭 한탄만 한다. 내가
"그자의 잡아가는 게 뉘 집에서 먹이는 돼지인고?"
하고 물은즉, 주인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겝죠"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잘못 남의 밭에 들어갔기로서니 수수대 하나 다친 것이 없는데, 그놈이 왜 그릇되이 저놈을 잡아 죽인담. 주인은 의당히 그자에게 돼지 값을 물려야 하잖는가?"
한즉, 주인은
"값을 물리다니, 돼지우리를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이 이쪽의 잘못이죠"
한다.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청의 4 대 황제]가 농사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그 법에 마소가 남의 곡식을 밟으면 갑절로 물어 주어야 하고, 함부로 마소를 놓는 자는 곤장 60 대를 맞히며, 양이나 돼지가 밭에 들어간 것을 밭 임자가 보면, 곧 그 짐승을 잡아가도 주인은 감히 내가 주인인 체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만 수레가 다니는 자유는 막지 못한다. 그리하여 길이 수렁이 되면 밭이랑 사이로도 수레를 끌고 들어가기 쉬우므로, 밭 임자는 항상 길을 잘 닦아서 밭을 지키기에 힘쓴다 한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청나라에 관심이 많다. 청나라는 대단한 자원 없이 인구도 적은 상태에서 종교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중국 대륙을 무리없이 점령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거란이나 금나라처럼 중국의 일부분인 중원(中原)만을 점령한 것이 아니고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몽고와 같이 97 년(1272 - 1368)의 짧은 기간 동안의 점령이 아니라 268 년(청나라의 성립 기간은 296 년(1616∼1912)이나 북경을 점령한 기간은 268 년(1644 - 1912)이다)의 긴 기간을 점령하여 중국 사람의 풍속을 많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전성기를 강희제(1654∼1722, 재위 1662 - 1722)에서 옹정제를 거쳐 이 열하일기에서 70을 맞는 건륭제(1711 - 1799, 재위 1735 - 1795)까지의 145 년 동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분석하면 왕이 어떤 능력을 가져야 국가를 융성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회가 있으면 이 시기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하기 바란다.
이 시기에 청나라에 반대하는 한(漢) 민족의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였고, 중국의 영토를 그 전의 왕조 명나라에 비해 두 배 이상 확장시켰으며,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면서도 충분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고, 상공업을 대단히 융성하게 하였다. 위의 세 황제는 황제가 된 후 짧은 시간 내에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거나 영토를 늘려 자기의 능력을 보인 후 내치(內治)를 완벽히 처리한 공통점이 있다.
연암이 놀란 위의 제도에는 원시적인 법의 개념이 보인다. 청나라의 장점은 원시적이고 간단한 법률이다. 이런 법률은 효과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법률이란 것의 허점을 알게 되어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게되면 효과가 없어지며 오히려 많은 소송사건의 원인이 된다.
군사국가답게 도로의 정비 책임을 보수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도로 옆의 농민에게 부담지운 점에도 주목하자.]
마을 옆에 벽돌 가마가 둘이 있다. 하나는 마침 거의 굳어서, 흙을 아궁이에 이겨 붙이고, 물을 수십 통 길어다가 잇달아 가마 위로 들어 붓는다. 가마 위가 조금 움푹 패어서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 가마가 한창 달아서 물을 부으면 곧 마르고 하므로 가마가 달아서 터지지 않게 물을 붓는 것 같다.
또 한 가마는 벌써 구워서 식었으므로, 방금 벽돌을 가마에서 끌어내는 중이다. 대체로 이 벽돌 가마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기왓가마와는 아주 다르다. 먼저 우리나라 가마의 잘못된 점을 말해야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왓가마는 곧 하나의 뉘어 놓은 아궁이여서 가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가마를 만드는 벽돌이 없기 때문에 나무를 세워서 흙으로 바라고 큰 소나무를 연료로 삼아서 이를 말리는데, 그 비용이 벌써 수월찮다. 아궁이가 길기만 하고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한다.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기운이 힘이 없으며 불기운이 힘이 없으므로 반드시 솔을 때서 불꽃을 세게 한다. 솔을 때서 불꽃을 세게 하므로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불길이 고르지 못하므로 불에 가까이 놓인 기와는 이지러지기가 일쑤이며, 먼 데 놓인 것은 잘 구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굽거나 옹기를 굽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요업의 제도가 다 이 모양이며, 그 솔을 때는 법도 역시 한가지니, 송진의 불광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세다. 그러나 솔을 한 번 베면 새 움이 돋아나지 않는 나무이므로, 한 번 옹기장이를 잘 못 만나면 사면의 뫼가 모두 벌거숭이가 된다. 백년을 두고 기른 것을 하루 아침에 다 없애 버리고, 다시 새처럼 사방으로 솔을 찾아서 흩어져 버린다. 이것은 오로지 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되어서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점도 역시 날로 줄어드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기운이 힘이 없으며'라는 것은 잘 모르겠으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옳은 분석으로 보인다. 매사에 이런 착실한 분석을 쌓아두는 것이 공학도로서는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곳의 벽돌 가마를 보니, 벽돌을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에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고, 또 마음대로 높고 크게 할 수 있어서 그 꼴이 마치 큰 인경을 엎어놓은 것 같다. 가마 위는 못처럼 움푹 패게 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고, 옆구리엔 연기 구멍을 네댓을 내어서 불길이 잘 타오르게 되었으며, 그 속에 벽돌을 놓되 서로 기대어서 불꽃이 잘 통하도록 되어 있다. 요약해 말한다면, 그 묘법은 벽돌을 쌓는 데 있다 하겠다. .....
대체 그 쌓는 법이, 벽돌을 눕히지 않고 모로 세워서 여남은 줄을 방고래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다 벽돌을 비스듬히 놓아서 차차 가마 천장에 닿게까지 쌓아 올린다. 그러는 중에 구멍이 저절로 뚫어져서 마치 고라니의 눈같이 된다. 불기운이 그리로 치오르면 그것이 각기 불목이 되어, 수없이 많은 불목이 불꽃을 빨아들이므로 불기운이 언제나 세어서 비록 저 하찮은 수수깡이나 기장대를 때도 고루 구워지고 잘 익는다. 그러므로 터지거나 뒤틀어지거나 할 걱정은 없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가마는 내화벽돌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일반 벽돌을 사용하므로 가마 내의 온도가 높아져 천장의 벽돌이 약간만 녹아도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위에 물을 부어 온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위가 오목하게 가마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기술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가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이제 요업은 금할 수 없는 일이요, 소나무 역시 한 이 있는 물건인즉, 먼저 가마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오성 이항복과 노가재[金昌業
1658(효종 9)~1721(경종 1)]가 모두 벽돌의 이로움을 논하였으되, 가마의 제도에 대하여는 상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혹은 말하기를
"수수깡이 삼백 줌이면 한 가마를 구을 수 있는데, 벽돌 8000 개가 나온다."
한다. 수수깡의 길이가 길 반이고, 굵기가 엄지 손가락만큼씩 되니, 한 줌이라야 겨우 너덧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 수수깡을 때면 불과 천 개 남짓 들여서 거의 만 개의 벽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이렇다면 믿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효율이다. 전문가인 조석연 교수님께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렇게 "수수깡 천 개로 만 개의 벽돌을 구울 수 있다."고 확실하게 수치를 제시하는 것이 공학도로서 매우 필요한 일이다.]
하루 해가 몹시 지리하여 한 해인 듯싶고, 저녁때가 될수록 더위가 더욱 심해져 졸려 견딜 수 없던 차에, 곁방에서 투전판이 벌어져 떠들고 야단들이다. 나도 뛰어가서 그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닢을 땄으므로, 술을 사서 실컷 마시니 가히 어제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다. 내가
"그래도 불복인가?"
하니, 조주부와 변주부가
"요행으로 이겼을 뿐이죠"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하자고 조르나, 나는
"뜻을 얻은 곳에 두 번 가지 말고,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하고 그만두었다.
7 월 3 일(9 일째)
[비가 와서 이웃에서 책의 목록을 빌어와 베낀 이야기]
7 월 4 일(10 일째)
밤새도록 비가 억수로 퍼부어 길을 떠나지 못하다. ... 부사와 서장관이 상사의 처소에 모이고, 또 여러 사람들을 불러서 물 건널 방도를 묻다가, 오랜 뒤에 모두 돌아가다. 아마 별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7 월 5 일(11 일째)
맑게 개다. 물이 막혀 또 묵다.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는다. 나는 그 구들 제도의 대략을 엿보았다. 먼저 높이 한 자 남짓하게 구들 바닥을 쌓아서 편평하게 만든 뒤에, 깨뜨린 벽돌로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그 위에는 벽돌을 깔 뿐이다.
벽돌의 두께가 거의 같으므로 깨뜨려서 굄돌을 해도 절름발이가 될 리 없고, 벽돌의 몸이 본시 가지런하므로 나란히 깔아 놓으면 틈이 날 리 없다. 골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만하고, 굄돌은 갈마를 들여[갈마들다;【동】서로 번갈아 들다] 불목이 되어 있다. 불이 불목에 이르면 그 넘어가는 힘이 빨아들이듯 하므로, 불꽃이 재를 휘몰아 불목이 메어지듯 세차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기어, 도로 나올 새가 없이 쏜살같이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굴뚝 밑의 깊이는 길이 넘는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말의 개자리다. 불꽃이 항상 재를 몰아다가 고래 속에 가득히 떨어뜨리므로, 3 년만에 한번씩 고랫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한다. 부뚜막은 한 길이나 땅을 파서 위로 아궁이를 내고, 땔나무는 거꾸로 집어넣는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 만큼 땅을 뚫고,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봉당 바닥과 가지런히 한다. 그 빈 데서 바람이 일어나서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 넣으므로, 연기가 조금도 새지 않는다. 또 굴뚝을 내는 법이, 큰 항아리 만큼 땅을 파고 벽돌을 탑처럼 쌓아 올리되 지붕과 가지런하게 하였으므로,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굴러들어서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이듯 한다. 이 법이 가장 묘하다.
대개 굴뚝에 틈이 생기면, 약간의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그러므로, 우리나라 온돌은 항상 불을 내뿜고 방이 골고루 덥지 않음은, 그 잘못이 모두 굴뚝에 있다. ...
나는 생각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몇 천 명의 형제들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법을 배워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저녁에 여럿이 술을 몇 잔 나누고, 밤이 이슥하여 취해 돌아와서 누웠다. 정사(正使)의 맞은 편 방인데, 다만 베 휘장이 중간을 가리었다. 전사는 벌써 한잠이 들었고, 나 혼자 담배를 피어 물고 정신이 몽롱한데, 머리맡에서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거,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른즉,
"도이노음이오" 하고 대답한다. 말소리가 심히 수상해서 나는,
"이놈, 누구야?" 하고 거듭 소리친다.
"소인 도이노음이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시대와 상방 하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난다. 뺨치는 소리가 들리고, 덜미를 밀어서 문 밖으로 끌어내는 모양이다.
이는 수비하는 청나라 군인이 밤마다 우리 일행을 숙소를 순찰하여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어 갔던 것이었다. 우리는 깊이 잠든 후였으므로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청나라 군인이 자기 스스로 <도이노옴>이라 함은 더욱 우스운 일이다.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하니, 이는 <도이(島夷)>의 준말이요, <노음(老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오(伊吾)>란 높은 어른께 여쭈는 말이다. 청나라 군인이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신의 행차를 치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을 배운 것이다.
7 월 6 일(12 일째)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나다. ...
초하구에서 점심을 먹다. 이른바 답동(畓洞, 원주(原註); 이른바 답(畓)자는 본디 없는 글자인데, 우리나라 아전들이 장부에 수전(水田) 두 글자를 합쳐서 논이란 뜻을 붙이고, 음을 답이라 하였다.)이나. 이곳이 항상 진창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름지었다.
[임성삼의 주(註);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한자로, 중국 땅에 우리나라 사람이 지명(地名)을 붙인 예이다.]
7 월 7 일(13 일째)
2 리를 행하여 말을 타고 그냥 물을 건너다. 강물이 비록 넓지는 않으나 물살 세기가 어제 건넜던 곳보다도 지나친다.
[관제묘에 들렸던 일이 간단히 적혀있다.]
[임성삼의 주(註); 칠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하다. 타향에서 칠석을 맞으면 감회가 있어 시를 한 수 지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
7 월 8 일(14 일째)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를 건너서, 냉정에서 아침밥을 먹다. 10 리 남짓하여 산 모롱이 하나를 접어들게 되었다. 태복이가 갑자기 국궁(鞠躬)하고 말 앞으로 달려나와서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백탑이 보임을 아뢰옵니다." 한다. 태복은 정진사의 마두이다. 산 모롱이가 아직 가려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빨리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가 오르락내리락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그래, 아니 아니, 천고의 영웅이 잘 울었으며, 미인이 눈물 많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릴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쇠와 돌에서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7 정[역주(譯註); 예기에서 말한 사람이 가진 일곱 가지 감정. 희(喜), 노(怒), 애(哀), 구(懼, 두려워할 구), 애(愛), 오(惡), 욕(欲)]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7 정 모두에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
한즉, 정은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다. 우는 까닭을 7 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저 갓난 아기에게 물어 보오. ...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만한 곳이 아니겠소."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이 개념에 감명을 받지 못하였으나, 조선일보의 이규태 선생은 매우 감명을 받아 여러번 이 부분을 반복하였다. 그분의 글도 읽어보기 바란다.
압록강을 건너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와 같이 산이 연속되는 길이나 여기서부터는 지평선이 계속 보일 정도로 평평한 땅이라고 한다.]
구요양에 들어갔다. 번화함과 장려함이 봉황성보다도 10 배나 더하였다.
구(舊)요동기
[역주(譯註); 구요동성을 중심으로 한 땅의 옛날부터의 연혁과, 명나라 말기에 명과 청의 두 나라가 격렬히 싸우던 역사를 서술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과 같이 여행하는 동안 연암이 가지고 간 것은 아주 필요한 것 뿐이다. 그러나 많은 책을 참고로 한 것 같이 역사의 상세한 부분까지 기록하고 분석하고 있다.]
7 월 9 일(15 일째)
요동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끊이지 않고 길 넓이가 수백 보나 되며, 길을 따라 양편에는 모두 수양버들을 심었다. 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는, 마주 선 문과 문 사이에 장마 때 물이 괴어서 가끔 저절로 큰 못이 이루어졌다. 집마다 기르는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그 위에 떠놀고, 양편 촌집들은 모두 물가의 누대처럼 붉은 난간과 푸른 헌함[건너방,누각 등의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이 좌우에 영롱하여 슬며시 강호의 생각이 난다. ...
마을이 가까워 올 때마다 군뢰를 시켜서 나팔을 불고, 네 명이 합창으로 권마성[역주(譯註); 높은 관리의 행차에 앞서, 하인이 위엄을 돋우고 일반 행인을 물러서게 하기 위해 길게 부르는 소리]을 부른다. 그러면 집집마다 여인들이 문이 메도록 뛰어나와서 구경을 한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간에 차림은 거의 같다.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고리를 드리웠으며, 성적(成赤; 분바르고 연지 찍는 것)은 살짝 하였다. 입에는 모두 담뱃대를 물었고, 손에는 신바닥 대는 베와 바늘과 실을 들고 어깨를 비비고 서서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한(漢)족 여자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궁혜를 신었다. 자색(姿色)은 만족 여자만 못하다. 만족 여자는 화용월태(花容月態)가 많았다.
[임성삼의 주(註); 청나라 전성기의 시골 풍경을 잘 표현하였다.
여기까지의 15 일 동안 적은 일기가 도강록이다.]
성경잡식(盛京雜識)
[역주(譯註); 7 월 10 일에서 14 일까지의 5 일간 기록이다. 십리하에서 소흑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327 리이다.]
[임성삼; 여기부터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옮긴다.]
7 월 10 일(16 일째)
십리하에서 일찍 떠나서 판교보 5 리, 장성점 5 리, 사하보 10 리, ... 도함 40 리를 가고, 백탑보에서 점심을 먹고 거기서 다시 일소대 5 리, ... 심양까지 9 리, 도합 20 리이니, 이날은 60 리를 행하였다. 심양에서 묵다.
[임성삼의 주(註); 연암이 이날부터는 일기의 첫머리에 그날 지난 곳의 이름과 각 지점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날 지난 총 거리를 적었다. 상당한 진보라고 생각한다.]
재판소 앞을 지나며 보니 문이 열려있다. ... 들어가니 막는 이가 없었다.
한 관인이 대 위에서 걸상에 걸터앉았고 그 뒤에는 한 사람이 손에 지필을 든 채 모시고 섰다. 뜰 아래는 한 죄인이 꿇어앉았고, 그 좌우에 한 쌍의 사람이 대곤장을 짚고 섰다.
그러나 분부나 거행 등 여러 가지 호통도 없이, 관인이 죄인을 마주 보고 순순히 말을 따진다. 한참만에 큰소리로 치라고 호통하니, 그 사령이 손에 들었던 곤장을 던지고 죄인 앞으로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네다섯 번 때리고 다시 전 자리에 돌아가서 막대를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기로 따귀 때리는 형은 옛적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 이렇게 간단하고 관대하였던 재판이 100 년 후에는 복잡하고 중벌을 내리는 것으로 변한다. 청나라 말의 작가 류어의 '노잔유기'에는 소위 '청렴한 관리'가 혐의 있는 사람을 재판을 받기도 전에 관청 문앞에 달아 매어 서서이 죽이는 대목이 나온다. 관리 우선주의의 병폐를 알고 싶은 사람은 한 번 읽어보기 권한다. 청나라는 그 후 곧 망한다.]
7 월 11 일(17 일째)
개다. 몹시 덥다. 심양에서 묵다.
[동네 사람들과 필담(筆談)한 내용이 나온다. 상당히 길다.]
7 월 12 일(18 일째)
... 이 날엔 85 리를 통행하다.
[말 위에서 잠을 자다가 낙타를 구경할 기회를 잃는다.] 나는
"이다음에는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리렸다."하고 타일렀다.
7 월 13 일(17 일째)
... 이 날에는 도합 82 리를 와서 백기보에 묵다. ...
영안교에서부터 아름드리 통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았는데, 다리의 높이가 두세 길이나 되고, 넓이가 다섯 길은 되며, 양쪽 나무 끝이 가지런하여 마치 한 칼로 밀어 놓은 듯싶다.
다리 밑 도랑엔 푸른 물이 끝없이 흐르고 진흙벌이 윤기가 난다. 만일 이를 개간해서 논을 만든다면 해마다 몇 만 섬의 가지각색의 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강희 황제가 일찍이 농정에 대한 모든 글을 지었은 즉, 지금 황제가 어찌 이 산해관 밖의 푸른 듯 검은 기름진 땅이 상상전(上上田)이 될 수 있음을 모르리오마는, 저 관 밖의 땅은 실로 자기네들의 일어난 고장이라, 벼가 기름지고 향기로우며 쌀밥이 차져서 백성이 혀에 감기도록 늘 먹어 버릇 들인다면 힘줄이 풀리고 뼈가 연해 져서 용맹을 쓸 수 없게 될 것인즉, 차라리 수수떡과 산벼밥을 늘상 먹게 하여 그로 하여금 주림을 잘 참고 혈기를 돋우어 구복(口腹)의 사치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함이니 비록 천리의 기름진 땅을 버릴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메마른 땅에 정의를 위해서 사는 백성이 되게 함이니 이게 그의 더욱 깊은 생각일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때가 청나라가 만주를 점령한 후 거의 150 년이 되었을 때인데도 이런 개념이 남아 있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 건륭황제때까지도 궁중에서 나라의 제사를 드릴 때 돼지고기 삶은 것 한가지만을 제물로 놓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 왕조 명나라가 음식의 사치로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시 100 년이 지나면, 같은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하루 24 시간 내내 200 가지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서태후가 움직일 때는 음식을 맡은 대 부대가 어느 곳에든지 따라 다녔다고 한다. 청나라는 그 후 곧 망했다. 나는 요즈음 우리나라에 번지고 있는 식도락에 대해 심히 우려한다. 로마의 멸망과 음식사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거칠게 먹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며 나라 융성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7 월 14 일(18 일째)
이 날에 일백리를 행하다. ...
이 길은 땅이 웅덩이져서 조금만 비가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되어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려우므로, 작년 봄에 산서 장사꾼 20여 명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일판문에 이르러 한꺼번에 빠졌으며, 우리나라 마부도 역시 두 사람이나 빠져 버렸다 한다.
[임성삼의 주(註); non-Newtonian 유체인 dilatant fluid에 가까운 수렁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는 길에 발착수에 이르러 80 리 진펄에 수레가 통할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와 양사도(당 고조의 사위) 등이 군대 일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으니 수레가 잇달았고, 다리를 놓을 제 당 태종이 말 위에서 손수 나무를 날라서 일을 도왔고, 때마침 눈보라가 심해서 횃불을 밝히고 건넜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이곳이 실제적인 고구려와 중국의 국경이 아니었을까?]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와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에서 자주 성경(盛京)으로 거둥[임주(任註); 임금의 행차를 거동(擧動)이라고 적고 거둥이라고 읽는다]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 끝이 한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2백 리 사이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 그 일솜씨 정미로움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간에서 항용 쓰는 물건들이라도 이를 본받아서 그 규모가 대체로 같으니 이는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 7)~1783(정조 7); 연암보다 5 살 위, 미국의 워싱턴보다 한 살 위]이 말하기를 중국의 심법(心法)이 우리로선 당치 못할 것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한 것이리라. 이 다리는 3 년 만에 한번씩 고친다 한다.
[임성삼의 주(註); 큰 국가는 정밀함이 있어야 하고, 큰 시설을 잘 관리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절의 중국이 넓은 영토를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산천기략(山川記略)
발해는 봉천부 남쪽에 있다. <성천통지>에 이르기를
"바다의 옆으로 나간 줄기를 발(渤; 바다 이름 발)이라 한다."
...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 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임성삼의 주(註); 아마 후퇴할 때는 이것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
태자하(太子河)는 요양 북쪽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를
"연태자 단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서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한다.
[임성삼 주(註); 관심있는 사람은 사기의 자객열전을 참조하라.]
관내정사(關內程史)
[역주(譯註); 7 월 24 일에서 시작하여 8 월 4 일까지 모두 11 일 동안이다.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백 40 리이다.]
[임성삼의 주(註); 서울에서 대구까지도 안되는 거리이다. 청나라는 산해관에서부터 북경까지의 이 거리를 진격하기 위해 명나라와 수십 년간을 싸웠다. 앞의 기록이 14 일에서 끝나고, 24 일에 시작한다.]
7 월 24 일
... 관내[산해관 안쪽]의 풍기는 관동에 비하여 아주 달라서 산천이 밝고 아름다우며 굽이굽이 그림 같다.
7 월 25 일
[임성삼의 주(註); 종이와 붓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부근에는 연암(燕巖)이 중국의 것이 좋고 우리나라의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자주 나오게 된다. 외국에 다녀 온 사람들이 주의하여야 할 점이다. 연암같으신 분도 이런 함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셨다. 이런 이야기는 생략한다.]
[중국의 부자집의 그림을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
"공연히 펴기 시작했네. 이렇게 긴 축을 무엇에 쓴단 말야. 병풍도 안되겠고 족자도 못 만들 것을."하고 투덜거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는 그림을 모르네만, 그림이야 주홍빛 나는 까마귀가 가장 좋네그려"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림이나 음악은 개인적인 기호가 있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좋다. 그러나 위와 같이 낮은 단계의 예술관을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된다. 예술은 여러 가지 단계와 품위가 있기 때문이다.]
세인들이 전하는 말에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대동강의] 부벽루에 올라가서,
長城一面 溶溶水 긴 성 저 한편에는 용용히 흐르는 강물이요
大野東頭 點點山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로다.
의 두 구를 읊고는 아무리 끙끙거려도 시상이 메말라서 그 다음이 계속되지 못한 재 통곡하고 누(樓)를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논평하기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그 뒤 천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을 지냈건만 다시 한 구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다."한다.
그러나 나는 늘 이것이 좋은 글귀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용용(溶溶; 질펀히 흐를 용)>은 큰 강의 형세를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동두(東頭)> <점점(點點)>의 산이란 그 거리가 40 리에 불과한데 어찌 대야(大野)라 이를 수 있으리요. ... 중국의 사신이 이 정자에 올라가서 본다면 반드시 대야의 두 글자를 웃을 것이다."
[임성삼의 註; 위의 김황원의 시는 오랜 기간 우리 조상님들이 많이 이야기하며 전해 내려온 것이다. 나는 한시를 잘 모르므로 위의 시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평안도의 산이 많은 길을 계속 가다가 40 리 정도의 평야를 본다면 위의 표현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을까? 꼭 만주의 넓은 벌판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평안도 사람 임성삼 적음.]
7 월 26 일
이제묘기(夷齊廟記)
난하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이 있어 '고죽성'이라 한다.
[임성삼의 주; 전에 소개한 사기 열전의 첫 편의 인물 백이, 숙제의 고향이다. 연암은 백이, 숙제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고증한다.]
사호석기(射虎石記)
영평부에서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가파른 언덕에 들난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보면 빛깔이 희고, 그 밑에는 비석이 있어 '한나라의 비(飛)장군이 호랑이를 쏜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나는 "청의 건륭 45 년 가을 7 월 26 일 조선인 아무아무는 이를 구경하다"라고 썼다.
[임성삼의 주(註); 사기 열전을 소개할 때 언급하지 못하였으나 한나라 무제 때 이(李)장군이 있었다. 성품이 순박하고 맡은 일을 잘 수행하며 부하들에게 관대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활을 잘 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으나 짐승이나 적이 30 보 이내로 들어와 자신이 있을 때에만 화살을 날렸다. 그러므로 명중을 시켰어도 상처를 받는 수가 많았다. 이 장군의 직함이 비(飛)장군이다. 그가 이곳에서 호랑이인줄 알고 바위를 쏘았더니 바위에 화살이 박혔다. 신기하여 다시 여러 번 쏘았으나 모두 바위에서 튀어나올 뿐이었다 한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이 이장군의 손자를 감싸주다가 '궁형'을 받게 된 것이다. 연암이 언급하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마천의 사기와 이어지는 것에 유의하라.
연암이 바위에 낙서한 것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일 것이나 낙서의 내용을 이 책에서 우리가 보고 있다. 연암은 후일 만리장성에도 낙서를 한다.]
7 월 27 일
[백이숙제의 묘에서 먹은 고사리에 체하여 고생한다.]
7 월 28 일
...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앞서 정축년[병자호란 다음해]에 잡혀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관동 천여 리에 무논이라고는 없던 것이 다만 이곳만은 물벼를 심고, 그 떡이나 엿 같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본국의 풍속을 많이 지녔다. 그리고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들의 사 먹는 술이나 음식의 값을 받지 않는 일도 없지 않았고, 그 여인들도 내외하지 않으며, 밀이 고국 이야기에 미칠 때는 눈물을 지우는 이도 많았다....
[어느 점포에 들려 걸려있는 족자에서 호질(虎叱)을 베끼는 것으로 되어있다. 호질의 내용 계속된다.
호질의 내용에 이어 다음의 글이 있다.]
이제 청(淸)이 천하의 주인이 된지 겨우 네 대째건만 그들은 모두 문무가 겸전하고, 수(壽)를 길게 누렸으며, 승리한 지 백년 동안에 온 누리가 고요하니, 이는 [중국인의 왕조인] 한나라나 당나라 때에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평안히 터를 닦고 모든 것을 건설하는 뜻을 볼 때에 이 또한 하나님이 배치한 제왕이 아닐 수 없다.
[임성삼의 주; 이 내용은 그당시 우리 선비들의 개념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7 월 29 일
[매 번 날짜 다음에 그날에 지난 곳의 이름과 각 곳의 거리, 그리고 그날 걸은 전체 거리가 적혀있다. 거의 모두가 90 리에서 100 리 사이이다.]
7 월 30 일
8 월 1 일
[북경에 도착하여 서관(우리 사신이 북경에 머무르는 집)에 들다.]
압록강으로부터 연경[북경]까지 모두 33 참(站)에 2 천 30 리였다.
[임성삼의 주(註);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거리 정도일 것이다. 하루에 100 리씩 갈 수만 있으면 20 일의 노정(路程)이다. 이 때는 30 여일 걸렸다.]
8 월 2 일
아침 일찍 예부, 호부의 관리와 광록시(궁중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관원이 모두 모여 왔다. 바깥 뜰에는 쌀과 콩을 실은 수레 대여섯 대와 돼지, 양, 닭, 거위, 채소 따위가 바깥 뜰에 가득 차있다. 각 부의 관원들이 나란히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데, 아무도 감히 떠드는 자가 없다.
정사에게는 날마다 거위 1 마리, 닭 3 마리, 돼지고기 5 근, 생선 3 마리, 우유 1 병, 두부 3 모, 밀가루 2 근, 황주(黃酒) 6 항아리, 저린 채소 3 근, 다엽(茶葉) 4 냥[한 냥은 37.5 g], 오이장아찌 4 냥, 소금 2 냥, 간장 6 냥, 된장 8 냥, 초 10 냥, 향유 1 냥, 후추 1 돈, 등유 3 종지, 초 3 자루, 내소유 3 냥, 세분 1 근 반, 생강 5 냥, 마늘 10 톨, 능금 15 개, 배 15 개, 감 15 개, 대추 1 근, 포도 1 근, 사과 15 개, 소주 1 병, 쌀 2 되, 땔나무 30 근과 사흘에 몽고양 1 마리씩을 준다. [아래로 갈수록 양이 작아진다.]
득상 종인(상(賞)을 탄 수행원) 30 명에게는 각기 날마다 고기 1 근 반, 밀가루 반 근, 저린 채소 2 냥, 소금 1 냥씩과 등유 6 종지, 황주 6 항아리, 쌀 1 되, 땔나무 4 근을 준다. 무상 종인(낮은 수행원) 221 명에게는 날마다 고기 반 근, 저린 채소 4 냥, 초 2 냥, 소금 1 냥, 쌀 1 되, 땔나무 4 근을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전체적으로 세심하게 규정되었다. 윗사람에게는 상당히 여러 종류의 풍부한 양이고, 아랫사람들에게도 양적으로는 풍부하였다. 중국의 체제가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월 3 일
8 월 4 일 [북경 시내 구경]
제 5 편 막북(漠北) 행정록
열하(熱河)에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거둥할 때 임금이 일시 머무는 곳]가 있다. 북경 동북쪽 420 리, 만리장성 밖 200 여리에 있다. ...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열하라 하여, 장성 밖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고, 강희황제 때부터 여름이면 이곳에 와 머물러 더위를 피하는 곳이 되었다. 황제가 거처하는 대궐은 단청과 조각도 별로 베풀지 않고, 피서산장이라고 하였는데, 황제는 이곳에 거처하며 책을 읽거나 숲속을 산책하여, 천하의 일을 잊고 평범한 생활을 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이곳이 험중한 요지(要地)이고 몽고의 목쟁이라서, 북쪽 변방을 방비하는 요지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하는 것이라 하지마는 실은 황제가 몸소 오랑캐를 방비하는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연암의 생각이 옳다. 그러나 유목민족은 여름과 겨울의 거처를 달리한다. 몽고족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도 황제가 일년의 반은 북경이 아닌 곳에서 지내었다. 이에 대하여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이번에 우리 사행(使行)은 연경에 이르러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명을 받고, 밤을 도와 닷새 만에 열하에 도착하였는데, 짐작에 연경에서 여기까지가 아무래도 400 여리인 것 같지가 않다. ... 실제로는 700 리이다. 모두 험하고 먼 길을 오가는 수고로움을 꺼려하므로, 성조께서 특별히 역참(驛站)을 줄여 400 여리라고 한 것이고 실을 700 리이다.
8 월 5 일 [열하를 향하여 출발, 빨리 가지 위해 일부의 인원으로 편성]
8 월 7 일 [만리장성을 통과]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두루 구경할 수 없어서, 술을 몇 잔 사 마시고 곧 만리장성을 나왔다. ... 삼중(三重)으로 된 관문을 나왔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적어 놓으려고, 차고 있는 칼을 빼어 벽돌 위의 이끼를 긁어내고, 주머니에서 붓과 벼루를 내어 성 밑에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밤을 새울 거리로 삼으려고 몇 잔을 사서 안장 옆에 매달아 놓았던 술을 모두 벼루에 붓고 별빛 아래 먹을 갈아 찬 이슬이 내리는 가운데 붓을 적시어 수십 자를 크게 써 놓았다.
[임성삼의 주(註); 요즈음 세계를 여행하며 낙서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편리한 셈이다. 만일 이 부근을 지나게 되는 사람은 현재의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에 낙서하는 일이 있는가를 살펴 나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미국인들이 유럽의 곳곳에 낙서를 많이 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8 월 9 일
[열하에 도착]
8 월 10 일
"전조(前朝) 명나라 때에는 전족(纏足; 중국 여자들의 발을 자라지 못하게 하여 작게 만드는 것)을 하면 그 부모에 죄를 주었고, 본조(本朝)에서도 금령이 지극히 엄하지만 끝내 금하지 못한 것은, 남자는 따르는데 여자는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임성삼의 주; 이 시대에 만주 여자는 전족을 않고, 중국 여자만 전족을 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전족이라는 것은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지극히 야만적인 풍습이다. 아래에 백과사전에서 골라낸 내용을 적는다.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묶어놓아 발육을 억제시키는 일종의 신체 변조로서 중국 특유의 풍습. 보통 3~4세 여자아이의 발을 목면으로 감아, 발의 성장을 저지시켜 그 형태를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처음에는 옆으로 감아 발을 가늘고 길게 만든 다음, 이어 길이로 감아 2번째 발가락 이하의 발가락들을 안쪽으로 굽어지게 만들어 발을 전체적으로 마름모꼴로 만든다. 발의 크기는 약 10~13㎝에 머무르게 되고, 5~6세가 되면 기본적 형태가 완성된다. 이후 전족포를 벗기고 전족용의 신발을 신는다. 어릴 적에는 전족이 비교적 쉬우나 좀 나이가 들면 염증과 화농을 동반하여 극심한 고통이 따를 뿐만 아니라 섬세한 발 형태를 얻기도 어렵다.
전족이 시작된 것은 송대 이후라고 한다. 전족을 하면 뼈가 가늘게 되어 여성의 몸 전체가 섬세하게 되는 미적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을 하지 못했으며, 남성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풍습이 중국인의 미추(美醜) 감각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사신들은 황제가 티베트의 중인 판첸 라마를 만나라는 지시에 복종할 것인가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8 월 11 일
[술집에 들어가] 술을 가져오라 하고 좋은 의자를 골라 앉았다. 술심부름꾼이 와서, "몇 냥쭝이나 드시겠읍니까?"하고 묻는다. 술을 무게로 달아 팔기 때문이다. 내가, "4 냥만 가져오라"하였더니, 술심부름꾼이 술을 데우러 가기에, "데울 것 없다. 그대로 달아 오너라." 하였다. 그는 웃으면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조그만 술 잔 두 개를 탁자 위에 벌여 놓는다.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주발을 가져오너라"하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나는 술을 죄다 종발[終發; 중발보다 작고 종지보다 조금 나부죽한 그릇]에 부어 단숨에 다 들이켰다. 여러 오랑캐들이 이것을 보고 서로 돌아다보며 몹시 놀라와한다. 나의 술 마시는 품이 매우 장쾌하게 보였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4 냥이면 150 g이니 소주 2 홉들이(360 mL) 반 병보다 약간 작은 양이다. 그러나 독한 술이니 거의 소주 한 병에 가까운 정도의 알콜을 단숨에 들이키신 것이다. 연암과 같이 술이 세신 분이, 술을 안드신 상태에서 이렇게 드시는 것은 큰 문제가 없으나,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매우 위험하니 절대로 따라하지 말 것.]
대체로 중국에서는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조촐하여,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반드시 데워 마시고, 비록 소주라도 역시 데워 마신다. 술잔은 은행 크기 정도밖에 안되는데도 이에 대고 조금 빨아 마시고 납겨서 도로 탁자에 놓았다가 잠시 후에 또 마시곤 하여 한꺼번에 들이마시는 일이 없다. 이른바 속되게 주발 대접 따위로 마시는 사람이 절대로 없다. ...
주머니에서 돈 여덟 잎을 꺼내서 술심부름꾼에게 주고 막 일어서는데,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의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일제히 도로 자리에 앉기를 청한다. 한 오랑캐가 일어나 자기의 의자를 비우고 나를 부축하여 앉힌다. ... 한 오랑캐가 일어나 술 석 잔을 가져오라 하여 탁자를 치며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찻잔에 남아 있는 차를 난간 밖으로 버리고, 석 잔 술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쭉 들이키고서 몸을 돌이켜 한 번 읍한 다음 큰 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오는데 ...
정사의 황제 뵈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황제께서 알현할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잠시 후에 사신을 만나보겠다는 황제의 명령이 있어서 ...
황제가 정문에 나와 문 안의 벽돌을 깐 곳에 앉았다. 의자를 베풀어 놓지않고, 다만 평상에 누른 보료를 깔아 놓았을 뿐이다. 좌우에 시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누른 옷을 입었는데, 칼을 찬 사람은 서너 쌍에 지나지 않고, 누른 일산(日傘)을 들고 선 사람이 두 쌍이다. 모두 숙연하여 조용하였다.
먼저 회교도의 태자를 앞으로 나오라 하여 황제가 몇 마디 물어보고는 곧 물러가게 하고, 다음에는 사신과 세 통사를 앞으로 나오라 하여, 모두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무릎을 땅에 대고 엉덩이를 붙이지 않는 예법이다. 황제가 물었다.
"국왕께서는 안녕하신가?" 사신이 공손히,
"예, 안녕하시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만주어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물어 통사 윤갑종이 만주어로,
"조금 아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좌우를 돌아보며 기뻐 웃었다.
[임성삼의 주(註); 역대의 청나라 황제들이 만주어를 지속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중원에 사는 만주인들은 이 후에 곧 만주어를 모두 잊었다. 현재는 만주에 사는 만주인들도 자기민족의 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중국말과 비슷하게 변형시키어,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만주어로 기록한 여러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청나라 초기에 한 만주의 한 부족이 청나라의 서쪽 끝으로 이주 명령을 받다 국경을 지키며 자리를 잡고 현재까지 살아왔다. 이 부족 수천 명 만이 전통적인 만주어를 말하고 있다. 현재 이 사람들 중 똑똑한 사람들을 북경으로 불러와 청나라의 만주어 문서를 번역시키고 있다고 한다.]
황제는 모나고 흰 얼굴에 누른 기운을 약간 띠었고, 수염이 반백이라, 모습이 60 은 되어 보이는데, 온화하여 마치 봄바람이 살랑이는 듯 화기가 감돈다.
사신이 황제의 앞에서 물러나 반열(班列)에 드니, 무사 예닐곱 명이 차례로 나아가 활을 쏘는데 한 대를 쏘고는 반드시 꿇어앉아 큰 소리로 외쳤다. 과녁을 맞춘 자가 둘인데 그 과녁이 우리나라의 주름진 가죽 같고, 한가운데 무슨 짐승 하나를 그렸다.
활쏘기가 끝나자 황제는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가고 ,,,
8 월 13 일
[이 사행(使行)의 목적인 황제의 생일이다. 사신은 하례하는 자리로 가고 연암은 근처를 구경한다.]
이 날 음식을 세 차례 내렸고, 또 사신에게 자기(瓷器) 다호(茶壺) 하나, 잔대를 곁드린 다종(茶鐘) 한 벌, 등으로 얽은 빈랑(檳 ; 열대 과일, 빈랑나무의 열매, 성질은 온(溫)하며 심복통(心腹痛), 각기 충심(脚氣衝心), 적취(積聚),설사, 두통 등에 쓰이며 구충제로도 쓰임) 주머니 하나, 칼 한 자루, 주석 차항아리 하나를 하사했다. 또 저녁 무렵에 젊은 내시 한 사람을 보내 주석으로 만든 네모난 항아리 하나를 내렸다.[여지라는 열대 식물의 즙(汁)이었다.]
8 월 17 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리장성을 지난다.]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을 다 한 틀로 박아내서 두께나 크기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 성 밑의 기초가 되는 부분은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땅 속으로 다섯 층이 들어가고 땅 밖으로 세 층이 나와 있다고 한다. 간혹 무너진 곳이 있는데, 성 두께가 다섯 발[임주(任註); 약 9 m]은 되겠고, 속에는 전혀 진흙을 섞지 않았고 오로지 벽돌 사이를 회로 메꾸어 쌓았다. 회의 두께를 종잇장같이 얇게 벽돌을 붙여 놓아, 마치 나무를 아교로 붙여 놓은 것 같다. 성 안팎은 먹줄을 놓아 깎아낸 것 같은데, 아래는 넓고 위는 빠르다. 대포나 충차(衝車)로도 좀처럼 깨뜨리기 어려우니, 겉의 벽돌이 깨어져 떨어지더라도 그 속에 쌓은 벽돌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해숫병에는 흔히 천 년 묵은 석회에다가 초를 타서 떡을 만들어 붙이는데, 오래 된 석회로는 이 장성(長城)의 것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옛날부터 사행(使行)이 으례히 이 석회를 구해갔다. 내가 젊었을 때 본 주먹만한 횟덩이가 이제보니 절대로 진짜가 아님을 알겠다. 모든 성의 제도가 장성과 같은데, 어떻게 주먹만한 횟덩이를 구할 수 있겠는가?
8 월 20 일
[다시 북경에 도착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하에서 가장 독한 술을 마시고, 소위 술집이란 모두 항아리 창에 새끼 문짝의 초라한 집인데, 길 왼쪽 조그만 협문에다가 새끼로 발을 만들어 드리우고, 헌 쳇바퀴로 등을 만들어 단 집이면 틀림없이 술집이다. 우리 시인들이 흔히 푸른 주기(酒旗)란 말을 쓰지마는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술집에는 일찍이 한 폭의 깃발도 용마루에 나부껴 본 적이 없다.
[임성삼의 주(註); 중국에 온지 거의 두 달이 지난 후 술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으신 연암(燕巖)이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보다 더 독한 술을 마셨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현재의 중국 술이 조금 센 것은 58 %가 나가는데 우리나라의 술은 몇 % 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술마시는 사람들은 주량이 대단하여, 반드시 커다란 주발에다가 술을 가득 따루어 가지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단숨에 마셔 버린다. 이것은 들이붓는 것이지 마시는 것이 아니다. 배가 부르기를 바라는 것이지 아취(雅趣)를 즐기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술을 마셨다 하면 반드시 취하고, 취하면 반드시 주정을 하고, 주정을 하면 반드시 치고 받아 싸움을 해서, 술집의 항아리와 그릇들을 모조리 걷어차고 부수고 한다. 그러니 소위 풍류(風流)의 모임이니 문아(文雅)의 모임이니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여기서와 같은 음주를 배불리 먹지 않는 것이라고 비웃는다. 비록 이 곳의 술집을 압록강 동쪽[우리나라 쪽]에 옮겨다 놓는다 하더라도 밤이 이슥해지기 전에 벌써 기구와 골동품을 두드려 부수고, 꽃을 꺾어 짓밟아 놓을 것이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랴.
[임성삼의 주(註); 지금부터 29 년전인 1971 년만 하더라도 술집에서 간혹 싸움이 있었다. 연암은 우리의 잘못된 습관을 꾸짖고 있으나 위의 글을 읽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약간의 통쾌한 감정이 슬며시 우러나오는 것은 웬 일일까?]
[이 이후는 날짜별로 된 기록이 없고 주제 별로 된 것이다. 박영사에서 5 권으로 번역한 열하일기에서는 위까지가 2 권이고, 이 뒤에 3 권이 있다.]
임성삼의 이야기
연암에 대한 이야기로 기억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승지가 출근하는데 길가에 있던 연암이 말을 걸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집으로 초대한 후, 안채에 손님이 왔다고 기별하고는 별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막걸리 한 병과 김치가 나오자 연암은 손님에게 한 잔을 따르고 자작으로 남은 술을 다 먹은 후, 그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승지에게 안먹을 거냐고 묻고는 승지 잔의 술까지 다 먹었다. 그 후 "오늘 내 술낚시에 걸려든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라고 하며 승지를 보냈다. 이때까지 통성명도 없었다. 연암이 술을 드시고 싶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술을 내 주지 않으므로 밖에 나와서 아무나 끌고 들어가 손님이라고 하여 술 한병을 내오게 하여 갈증을 푸신 것이다.
그 날 별 일이 없었느냐는 정조 대왕의 말에 승지가 이러한 해괴한 일을 당했다고 말씀드렸다. 정조 대왕은 "그는 필시 연암 박지원일 것이다. 그가 자기의 재주를 너무 믿기에 잠시 쉬게 하였더니 어려운 모양이구나"하시고 그의 궁핍함을 생각하여 벼슬을 내리셨다고 한다. 연암이 처음 벼슬을 한 것이 49세였으니, 이 때는 50이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열하일기 원고를 조카에게 보여주었더니 상당히 심한 비판을 하였다. 결국 내용에 여러 잡다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극도로 난 연암은 원고를 불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즉시 불에서 꺼내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