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황진이에 대해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실제 이름은 무엇이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그리고,
왜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고 또 기억하려 했는지...양반가의 딸로 태어나 기녀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우리네 역사에서 <여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건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그래도 마음에 두고 싶은 세 사람. 황 진이, 신 사임당, 그리고 허 난설헌.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보자면 세 여인 모두 결코 '행복한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남동생인 허 균과 함께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던 허 난설헌, 그러나 죽어서도 남편과 같은 묘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던 그녀. 서리서리 먖힌 마음 속 恨의 발로였겠지요. 죽어서까지도 남편의 묘를 사이에 두고 작은댁과 나란히 묻힐망정 그 집 귀신으로서의 일생에 목숨을 걸던 그 옛날의 우리 여인들.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解語話 -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妓女를 일컫습니다. 중국의 歌妓와 마찬가지로 賣樂不賣身이었겠으나,줄세우기 문화에서 한 발자욱이라도 벗어나면 그건 곧 다른 세계로의 전락을 뜻하는 전통사회에서는 그녀 역시 기존의 가치관에 의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입니다. 그녀의 시조를 읽을때면 '주옥같은'이란 진부한 표현 이외엔 달리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 바라만 보아도 안타깝고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은 삼추도 일각이라. 기나긴 동짓달 밤이라도 보태어, 그리운 마음 엉겨있던 님과의 서리서리 맺힌 정을 펴는 날 구비구비 풀어내고 싶은 여인의 애틋한 감상이 녹아있습니다.
또 한떨기 해어화인 梅窓의 望夫詞와 비교하면 두 여인의 기질이 사뭇 다름이 느껴지네요.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생각날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이 역시 '기다림'을 화두로 삼고 있으나, 혹여 님의 마음 변하기라도 할작시면 한양간단 이도령 말 들은 춘향이 모양,머리칼 쪽쪽 뜯어 님의 발치에 팽개치지나 않을지, 읽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황진이의 존재가 오늘날까지도 인정받는 이유는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6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 이외에도 속(俗)의 경계를 뛰어넘은 천의무봉한 도가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이는 黃娘 본인의 무위자연하던 기질에, 스캔들이라고 밖엔 말할수 없던 수 많은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체득한 교양이 포개어지고, 또 가장 중요한, 스승이자 情人이었던 서화담의 氣一元論의 영향은 아닐지. 세속의 명리나 이목,모두 헛되고 또 헛된 뜬 구름같은 그림자연극 - 戱夢에 불과하단걸 알아버린 그녀의 초월성이 '죽거든 길가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말로 남은건 아닌지...
동짓달 하늘에 휘영청 뜬 달 - 그 달빛이 말해 주는건 나의 마음일까요,님의 마음일까요.이런들 어떻고 또 저런들 어떠하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 왜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을 보느냐고 일갈하는 사람에게 黃娘은 쓴 웃음을 날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을 보려는 네 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도 모두가 네 안에 있는걸,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하면서요.
황진이는 16세기에 활동한 우리 나라의 이름 있는 기생이다. 그녀는 개성에서 살던 황진사의 첩의 딸로 태어났다. 호는 명월이었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수려한 용모에 서예와 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그 소문이 각지에 퍼졌고 또 많은 일화도 남겼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해의 일화이다. 한동네에 살던 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던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대문앞에 이르자 말뚝처림 굳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은 총각의 친구 가 이를 황진이에게 알이자 황진이는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나가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 주었는데 그 제서야 상여가 움직이더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당시 개성 사람들은 용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3가지 뛰어난 것)으로 꼽으며 자랑하였다. 황진이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짙은 서정으로 섬세 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시조는 그러한 대표작의 하나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믓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황진이는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러한 황진이가 금강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날 그의 명성을 듣고 있던 서울의 한 젊은이가 개성으로 놀러 왔다. 유람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황진이는 금강산을 같이 가자며 말했다. "이웃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원이라 하였거든 우린 조선 사람으로서 제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본다면 어찌 수치가 아니겠소. 우연히 당신을 만나고보니 가히 동무하여 유람을 갈 만하오." 젊은이도 선뜻 응해 나섰다. 황진이는 번잡한 행장을 다 버리고 굵은 삼베치마를 입고 망태를 썼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동행인 젊은이 또한 무명옷에 삿갓을 쓴 봇짐차림 이었다. 얼핏 보면 허물없는 오누이 같은 그들의 차임새는 까다로운 남녀간의 예의범절을 벗어나 금강산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려는 여유가 엿보였다. 유람길에 나선 그들은 수 백리 길을 걸어서 금강산에 이르렀다. 과연 소문대로 금강산의 절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날마다 희열에 넘쳐 금강산의 명소들을 둘러보며 서로 노래도 부르고 화답시도 지으며 산천경개를 즐기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꿈같은 유람에 어느덧 노자도 떨어져 거의 굶다시피하는 지경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이 갔던 젊은이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지경에도 황진이의 유람은 계속되었다. 여행중에 다친 다리를 이끌고 민가나 절간에서 밥을 빌어 먹으면서도, 금강산의 명소들을 다 돌아보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한 여인의 행적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이 이야기는 황진이의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난 일화이다. 마흔살을 전후로 하여 세상을 떠난 황진이는 살어 생전에 많은 일화와 시를 남겼지만 금강산을 노래한 그의 시가 남아있지 않음이 유감일 따름이다.
황진이의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