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 세계기록유산, 그리고 세계무형유산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한국은 최고 수준의 문화선진국이다.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에 비해 볼 때 등재된 유산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외국인들은 물론 한국인들에게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은 104개국 582건인데, 창덕궁 등 7건을 등재한 한국보다 많은 문화유산을 등재시킨 나라는 18개국 정도이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45개국 91건으로, 한국이 등재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등 4건 보다 많은 유산을 등재한 나라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 4개국뿐이다. 세계무형유산에 있어서는 한국의 위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한국은 판소리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등재시켰다.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41개국 47건에 불과하며, 한국이 등재한 2건 보다 많은 유산을 등재시킨 나라는 하나도 없다. 다섯 개 나라가 한국과 동일하게 2건씩을 등재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세계 수준의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자긍심과 함께 책임감도 느껴야 한다. 즉 이러한 문화유산의 존재와 가치를 세계인들이 제대로 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이들을 보호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국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독특성이나 우수성은 매우 자연스럽게 세계인들의 머리와 가슴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한반도 내에 남아 있거나 혹은 한민족에 의해 창조된 문화적 흔적으로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14점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14점의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은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 5천년을 균형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발간될 이 책을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향상되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기를 기대해본다.
다섯번째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海印寺 藏經版殿)"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 대장경판을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寶庫)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다.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이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9세기 초에 세워진 고려는 외세의 간섭과 도움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발해의 영토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적이었으며 발해 주민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통일은 20세기 중반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단일한 국가체제의 시작점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豪族)들의 지원과 지지를 얻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세습하는 데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귀족화 되었다. 고려사회는 문벌 귀족중심의 사회였으며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청자·나전칠기 등의 예술품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특산품은 인삼·종이 등과 함께 송(宋)으로 수출되었고, 송으로부터는 비단·향료·서적 등이 수입되었다. 고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오가며 고려라는 국명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외국어 명칭인 코리어는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시기 470여 년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을 기준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의 문벌 귀족들은 점차 정치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왕실 및 다른 귀족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12세기 초반 일어난 여러 반란사건은 모두 소수 문벌귀족들의 권력독점과 왕권의 약화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난을 겪으면서도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체제는 모순을 더해갔으며,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적극적 개혁의 시도는 없었다.
문벌 귀족 중심의 정국운영은 문신들의 우대와 무신들의 천시로 이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은 12세기 후반 문신들을 살해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무인들 사이에 다시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무신정권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정국의 불안정은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장악하며 해소되었다. 최충헌의 집권 이후 권력은 최씨가문에 세습되어 4대 62년간 최씨 무단통치가 이루어졌다. 90여년에 걸친 무신통치시기에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란이 발생하였으며, 천민 등 민중의 저항으로 무신정권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체제 개혁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13세기 전반 몽고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닥쳤다. 무신정권은 강화도(江華島)로 수도를 옮기며 40년간 몽고에 항전했으나 결국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무신정권도 무너졌다. 이후 고려의 국정은 원(몽고는 1271년에 元으로 국호를 바꿨다)의 간섭아래 운영되었다. 70여 년간 원의 간섭아래에서 고려사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원의 영향으로 고려에는 몽고의 풍습이 들어왔고, 원의 필요에 의해 고려 국왕을 교체하는 등 고려 국왕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사회모순은 더욱 증폭되며 고려 말의 혼란상을 낳았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高宗)때 만든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초 고려 현종(顯宗)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13세기 초 몽고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목판인쇄를 하였는데, 목판인쇄는 동일한 인쇄물의 수요가 많은 곳에서는 매우 편리한 방법이었다. 판각을 한번 해놓으면 인쇄에 편리하고, 비교적 오랜 기간 보관하였다가 다시 인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불교나 유교의 각종 서적을 출판하기 위해 신라의 목판인쇄술을 계승·발전시켰다. 이것은 불경 등의 인쇄가 크게 성행하였고, 또한 귀족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서적을 수집·보관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목판인쇄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장경이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인해 14세기말에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무렵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장경판전의 건물 배치는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한 구조이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 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을 만들 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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