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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그녀 - 화이트
Manijoa 2005 Autumn of Thinking

:: 음악애호가들의 낭만시대를 대변한 푸른하늘의 유영석 ::

1988년이었던가, 푸른 하늘의 <겨울바다>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 퍼지던 그때가 떠오른다. 얼굴 없는 가수로 이름을 날린 라디오 스타가 푸른 하늘 하나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수억 원씩 퍼부은 뮤직비디오 틀어대지 않아도, 그저 좋은 노래 하나면 충분했던, 음악 애호가들의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푸른 하늘 또는 유영석이었다는 사실은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의 전성기는 "겨울바다"에서 "눈물 나는 날에는"으로 이어지는 초창기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이후의 앨범들을 통해서는 이때에 필적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지만 (푸른 하늘의 5집이 당시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던 공일오비의 3집에 완전히 밀렸다! 라고 하셨던 단골 레코드 가게 아저씨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쨌든간 푸른 하늘은 신세대 담론이 폭발하기 전이었던 80년대 끝 무렵에 등장하여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변진섭과는 달리 시대의 변혁기를 무난하게 헤쳐 나가며 이승환이나 신승훈, 그리고 공일오비와 같은 90년대의 대표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뮤지션이었단 얘기다. 6집 오렌지 나라의 앨리스를 끝으로 푸른 하늘은 해체하였지만 유영석은 "화이트"란 이름의 팀을 결성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나간다.
   녹슬지 않은 작곡능력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인 발라드와 뮤지컬 풍의 노래들을 앞세워 대중들을 찾은 푸른 하늘 이후 유영석의 음악들이 엄청난 발전이나 변혁의 기운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박정운이나 조정현 같은 동시대의 가수들이 미사리 라이브 카페촌을 자신들의 새로운 무대로 삼고 있거나 (미사리 카페촌을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나 그 쪽 무대가 앨범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김민우나 변진섭처럼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서는 와중에도 서서히 몰락해 가는 음반시장의 한 복판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자 한 유영석의 고군분투만큼은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그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이 유희열만큼 감각적이지 않다고 해도, 또 그의 목소리가 이승환이나 이승철만큼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는다 해도 변함 없이 아름다운 노래들을 만들고 불러 줄 그의 앞길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조용필처럼 한 시대를 휘어잡은 거장이 아닌 다음에야, 시시각각 다르게 변해가는 예측불허의 대중문화 시장 속에서 십여 년간 꾸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 얼마나 힘든 일이란 말인가.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그 스스로 져버리지 않는 한 눈물 나는 날에 겨울바다에서 맛보았던 그 추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물론 그가 새롭게 내놓을 노래들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그는 가수라기보다 프로듀서 겸 작곡가다. 직업을 적으라면 작곡가라고 적고 싶다고 한다. 늦가을쯤엔 근사한 뮤지컬 앨범을 하나 발표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산다. 재즈 음악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고 말이다. 그리고 최근 베스트 앨범 [그 때부터 지금까지]를 발표했다. 기존의 베스트 앨범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선곡한 곡들이어서 애착이 더 간다고. 그야말로 자식 같은 곡들이기에 기왕이면 포장도 예쁘게 꾸미고 싶어 디자인에도 신경 쓴 것이고 작곡가로서의 ‘나’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명함 같은 의미로 생각했다고 한다. 매사에 유머러스하고 덜렁거리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결벽증이 있어 보이는 그다운 깔끔함과 세심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사진첩인지 일기장 겸 추억 록인지 모를 두꺼운 책자 속에 정말 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음악을 들으며 추억을 곱씹고 글을 읽으며 자신이 살아 온 삶의 궤적 또한 반추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될 듯 하다. 앨범의 머리 곡'약속'과 마지막 곡 '배려'는 신곡이다. 일부러 신곡 둘을 앞뒤로 배치해 이전 곡들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을 주려 했다. 신보와 베스트 앨범의 매력을 고루 느끼게 하고픈 욕심도 있었고. 선곡에 특히 신경을 썼고 그 기준은 ‘연주’였단다. 어쩌다 보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들만 모인 것 같지만 이는 한편 음악에는 틀림없이 모두의 귀에 어필하는 범세계적이고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반증하는 의미도 되리라는 생각에 불필요한 가감(加減)은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부탁 삼아 자신의 음악을 들을 때엔 전문가들처럼 편곡이나 기술적인 측면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평범한 팬이 되어 감성적인 차원의 감상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였다.
푸른 하늘’이라는 이름의 밴드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작품들 가운데 1988년의 ‘겨울바다’에서부터 1993년의 ‘마지막 그 아쉬움은 기나 긴 시간 속에 묻어 둔 채’에 이르는 6년간의 긴 여정이 담겨 있다. 6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그 중간에 한 장의 소품집 비슷한 성격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두 장 짜리 라이브 앨범과 두 장 짜리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던 일도 기억한다. 1994년부터는 ‘화이트(White)’였고 총 네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정시로와 함께 ‘화이트 뱅크(White Bank)’로 활동했던 것도 기억한다. 비록 이 앨범이 그 연대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으로 훑어주고 있진 않으나 그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성껏 만든 앨범 패키지 속에 맛 좋은 진짜 포크 커틀릿(돈가스)처럼 두툼하게 담겨 있는 사진집 & 일기장 겸 추억록 속에는 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으며 저마다의 삶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마련될 것 같다. 앨범의 머리 곡 ‘약속’과 마지막 곡 ‘배려’는 신곡이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탓에 그가 예전 같지 않은 것이 느껴진다. ‘푸른 하늘’ 시절에 ‘송재호’에게 ‘늦지 않았음을’을 줬을 때 그 노래가 ‘유영석’의 곡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의 작곡 스타일과 코드 진행에는 그 정도의 전형적인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김장훈’에게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슬픈 선물’을 줬을 때 자칫 속을 뻔했다. 그 아티스트와 함께 팬들도 성장한다는 그 평범한 진리에서 나의 귀는 조금 벗어나 있었던가보다.
나이도 서른이 조금 더 넘었다. 기혼자다. 그런 것이 그의 음악에 안정과 안주를 선사한 것은 아닌 듯 싶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는 따스한 노래, 밝고 순수한 감성의 곡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주특기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날밤을 지샌 경험이 없는 무쇠 심장이 이 한국 땅에 실존할까? 그의 가사는 언제나 듣는 이의 경험과 일치했고 앞만 보며 달음질치기 바쁜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언제부턴가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해 말장난만 하다 들어가는 것 같아 그를 미워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것이 더 무서운 것 같다. 방심하다가 뒤통수를 한 대 힘껏 얻어맞은 기분이다.
‘푸른 하늘’ 시절의 음악 가운데 주요 히트곡과 히트와 무관하게 사랑 받았던 곡들만 모아 봐도 두 장 짜리 CD로도 부족할 것임을 잘 안다. 이미 발매했던 두 장 짜리 베스트로도 부족함이 컸다. 그래서 수록곡의 선정과 배열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궁금하다. 아무래도 히트곡을 엄선했다는 느낌이 크지만 그것 또한 팬들을, 소비자를 위한 배려 아닌 개인적인 차원의 그 무엇이었으리라 짐작만 해 본다. 워낙 곡들이 구구절절해 애인한테 선물하면 헤어지자는 의미로 곡해할까 곤란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친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을 듯 하다. 학창 시절 무박2일로 겨울 바다 행을 감행할 때 같이 밤 기차를 탔던 바로 그 친구라면 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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