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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해설 >

이 노래는 백기완의 [묏비나리](1980년 12월)에서 가사를 따 왔다. 원래의 詩는 대략 이러하다.

(상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하략)

이 노래는 광주 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작곡되었다. 기타와 괭과리의 반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호탕하면서도 투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구절이 원래는 '앞서서 가나니'였다는 점은 이 노래의 맥락을 짐작하게 한다. 즉 두 영혼이 '우리는 앞서서 가니, 살아 있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어 뒤를 따르라.'고 독려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다짐하는 내용인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낸 최초의 작품이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1년에 광주항쟁은 '항쟁'으로서보다는 '대학살'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죽음에 충격받고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괴감, 죄의식에 젖어 있었고, 이러한 패배감과 자괴감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까지 진보적 지식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찍이 그 패배감과 자괴감을 올바르게 극복해냄으로써 1980년대 새로운 노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Manijoa 2005 SPRING-
- 임을 위한 행진곡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최도은'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최도은님 특유의 힘찬기운이 압권!]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젊은 층의 네티즌들이 돌려 듣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386세대들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노래로 ‘사천만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라는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녔다. 그만큼 민중가요 중에서는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곡이다.  “여느 민중가요가 그러하듯 이 노래 역시 같이 따라 부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 군부독재 타도를 외칠 때도 사랑받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하여 노동운동의 시위가 있을 때도 사랑받았던 노래입니다.386세대, 그들이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격동의 80년대를 거쳐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싶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얽힌 이야기
1980년 5월 27일. 당시 <5.18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으로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했던 윤상원은 결국 진압군의 총탄을 맞아 전사한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하나. 그리고 평생 노동운동에 헌신해오다 과로로 숨진 박기순 열사. 이 둘은 1982년 5.18묘역에 나란히 합장되어 완전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들의 ‘영혼 결혼식’에 사용되었던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 이 곡은 지난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차지한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선생의 시를 노랫말을 바꿔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네이버 민주닷컴님이 올리신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해설과 가사를 첨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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