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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 양병집
 

양병집 | 서울음반/서울음반(기획사) | 2005년 03월
한국적 포크음악의 기수 양병집
그가 12년 만에 선사하는 포근한 작품집

 
오늘 같은 날 비나오구려
때 묻은 내 몸뚱이를 씻어주시게
비나오구려 오늘 같은 날
지저분한 저 길거리를 씻어주시게
굴러가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하늘에다 던져 봐도 받지를 않네
오늘 같은 날 에라 집에나 가지
오늘만은 집 냄새도 향기롭다네

오늘 같은 날 보고 싶구려
예쁘장한 얼굴이나 보여주시게
보고 싶구려 오늘 같은 날
어리석은 그 위로라도 들려주시게
십 원짜리 깨끗이 깨끗이 닦아
당신에게 전화해도 받지를 않네
오늘 같은 날 에라 집에나 가지
오늘만은 집 냄새도 향기롭다네
오늘만은 집 냄새도 향기롭다네
오늘만은 집 냄새도 향기롭다네
 
오늘 같은 날
마니조아 계정
 

 
 
  양병집은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과 함께 초창기 한국 모던 포크의 4인방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이 음악 언어가 요구하는 세계관의 독자적인 형상화 역량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탓에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이 주로 밥 딜런이나 우디 거스리같은 서구 모던 포크의 거장들의 음악을 번안하거나 우리의 전통적인 구전음악을 되살리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것만으로 자신의 이력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대학가의 전투적인 저항가들도 웅장한 키보드 사운드를 채택하기 시작하면서 70년대의 통기타 소리를 무장 해제시키고 있던 80년대의 중반에 양병집은 묵묵히 사라져 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별 반응없이 끝났던 1980년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1985년 앨범의 흥행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집의 속살은 전작은 물론이고 어떤 한국 모던 포크의 걸작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마디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의 2차 혁명의 포문이 불당겨지던 1985년의 숨은 보석이다.
 
포크 록의 전형적인 담담함으로 앨범은 문을 연다. <오늘 같은 날>은 '비나 왔으면' 좋을 답답한 일상에서 '어리석은 위로'라도 받기 위해 '십원짜리 동전을 깨끗이 닦아' 전화하지만 '결국' 집으로밖에 갈 수 없는, 도시의 중심에서 떠밀린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누추한 자아는 그저 누추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와, 특히 <우리의 김씨>를 보라.
 
본래 제목이 <구인광고>인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는 정태춘의 곡으로, 양병집 특유의 걸찍하고 텁텁한 목청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소리없이 밝히는 진정한 인간을 찾아 나서며 이에 대한 응답이 바로 '도매상이 모여 있는 시장길에서 물건을 싣고 있는 우리의 김씨'인 것이다. '옷차림은 남루하고 키는 작지만', 그리고 '내년에는 큰딸아이 시집 보내고 마누라의 속치마도 사다 줘야'하는 그의 김씨는 바로 어두운 시대를 끝까지 살아남는 자신의 초상인 것이다.
 
비록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앨범은 양병집이 단순히 서구 자유주의 문화의 '전달자'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그 문법을 기반으로 한국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소리를 창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소리를 찾은 것이다. 포크역사에 길이남을 초희귀작으로, 좀처러 보기힘든 양병집의 1집음반이 LP음반으로 재발매되었다.
1970년대, 세계의 젊은이들이 반전운동의 확산과 함께 히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을때 우리는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일컬어지는 ‘청년문화’와 ‘이농현상’, 그리고‘공돌이, 공순이’ 로 일컬어지는 ‘또다른 문화’ 가 있었다.

이런 배경속에서 탄생된 양병집의 [넋두리(모음)]은 70년대, 그앞면과 이면을 정확히 관통하는‘메시지 송’ 이자, 포크송 보다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요소가 많은 ‘프로테스트송’(protest song) 이라 볼 수 있다.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70년대 우리나라3대 저항가수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양병집의 첫 음반 [넋두리]는 그가, 이음반에 일관된 성격을 부여하는 프로듀서로서의 능력과감각을 겸비했음을 보여주며 그만의 독특한 창법,과 현실을 심도있게 헤집고 들어가는 작가주의적 성향을 다분히 취하고 있다. 그래서 [넋두리]는 70년대 우리 젊은이들의 메시지를 담고 당시의 정서 공감대를 대변하는 작용을 한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타복네’ 와 ‘아가에게’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메리칸 포크이지만 양병집이 새롭게 편곡하고 노랫말을 만들어 불러 이노래들은 원곡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소낙비’ 만이 원곡의 가사에 준했으며 나머지 곡들은 모두 아메리칸 포크의 뼈대에 당시 한국 현실을 빗댄 가사를 붙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병집은 밥딜런,과 피트시거, 우디 거슬리를 들고 70년대 한국 젊은이들 앞에 ‘개간꾼’ 처럼 등장 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시대적 상황은 그의 넋두리를 용납지 않았다. 그래서 [넋두리]는 불과 1년 4개월만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고 대중들로부터도 잊혀지게 된다.

- 이제 30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이음반이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는 [넋두리]가 70년대의 가객, 양병집의 치열한 몸짓으로 표현된 당시 사회의 모순, 그앞면과 이면을 정확히 관통한 기록임과 아울러 사회적, 음악적 가치를 지닌 대중문화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생생히 복원된 [넋두리(모음)]을 통해 감동으로 다가올 양병집의 메시지에 보다 많은 이들이 다가설수 있게 되길 바란다.
 
Manijoa 2006. 0826 Last Hot Summer
 
 
 
 
 
 
 
아래는 양병집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양병집 - 잃어버린전설(peter paul & mary - weep for jamie)
 
불운의 저항가수, 저주받은 걸작들의 제작자: 양병집과의 인터뷰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일시 및 장소: 2002년 4월 15일 흑석동 '팝 아트' 그리고 그 뒤 여러 번의 대화와 전화 통화
질문 및 참석: 신현준, 최지선
정리: 신현준, 이성식, 이길훈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지상분출의 신호탄이 되었던 음반 [우리 노래 전시회](서라벌, SRB 0142, 1984)의 ('건전가요'를 제외한) 마지막 트랙은 "이 세상 사람이"라는 곡이다. 아마도 이 곡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이 들은 사람은 '신촌파'의 젊은 기수들(예를 들어 김현식, 정희남, 김동환, 박경 등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수의 이름은 양병집이다. 어쨌든 '신인'이 참여한 이 음반에 양병집같은 '원로'가 끼어 있는 점이 이상하다면 이 앨범의 기획자인 최성원과 양병집의 나이가 3년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한다. 또 한가지 뜻밖의 사실은 이 곡의 작곡자가 다름 아닌 조동익이라는 사실이다. 조동익 같이 섬약한 심성의 인물이 단조의 어두운 분위기에 '샤우팅'에 가까운 창법의 노래가 필요한 이 곡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 있다.
 
이런 인맥을 확인하려면 1981~82년 경 신촌역(기차역) 부근에 있었던 라이브 음악 카페의 뮤직 모노(Music Mono)의 주인이 양병집이었으며, 이곳에서 최성원이 연예부장, 조동익이 DJ를 보았다는 야사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곳이 박호준과 김광민 등이 있던 동서남북을 길러낸 곳이자, 최성원이 전인권(과 허성욱)을 만나서 들국화의 단초를 마련한 곳이자, 이주호와 유익종의 2인조 해바라기가 주류 진입을 목전에 두기 직전 활동하던 곳이라는 사실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길러낸 사람들은 정태춘과 16년 차이 등 무수하다. 비록 '최초 발굴'에 그쳤지만.
 
양병집(1951년 2월 2일 생)은 이렇게 여러 사람을 키우고 정작 자신은 뒷전에 물러 나 있는 존재다. 그 이유에 대해 자신은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건 겸손일 것이다. 부단하게 무엇인가 하려고 했던 삶, 그 삶을 펼쳐 보기로 하자. 읽고 나서 무언가 '찡한' 느낌이 몰려온다면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해 주도록 애쓰자.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란 요즘 그가 제작한 후배 '손지연의 음반의 구입하는 일'인 것 같았다.

"세시봉이 메이저였다면, 내쉬빌은 요즘 말로 언더나 인디였어요": 명동 내쉬빌 시절
Q: 현재의 근황부터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 1999년 10월에 호주에서 귀국 했습니다. 2001년에 영주권 반납했고요. 지금 BJ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김하용덕과 손지연 같은 후배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Q: 다닌 학교는 어떻게 되는지 간략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중앙고등학교 다니다가 때려 친 후에 검정고시 쳐서 남들보다 일찍 69학번으로 서라벌 예대 초급대학(중앙대) 음악과에 들어가서 1년 수료했습니다.
 
Q: 예전 기사를 찾아보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우미관 쪽에 있던 음악 감상실에 출입하셨다는 내용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주로 어떤 음악을 들으셨는지 등등 학창 시절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 그 때는 포크 음악보다는 록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미회관과 화신 백화점 사이 골목에 이인성 악단이 주로 벤처스 음악을 연주를 했던 디쉐네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어요. 디쉐네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니까 1968년도에 생긴 것 같은데요, 200평이 넘었으니까 꽤 큰 규모였어요. 낮에는 보통 음악 감상실이었고, 저녁에는 라이브 연주를 했어요. 그 때 연주하던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인성 악단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냐하면 "Mule Skinner Blues", "Telstar" 같은 곡을 기가 막히게 연주했어요. 다른 팀과 비교해서 확 튀고 구별이 되었다고 할까?
 
Q: '포크 가수'로서는 팝이나 록을 폭넓게 들은 것 같습니다.
- 그 때는 디쉐네 외에도 이길봉 악단이 연주하던 미도파 살롱 등 비슷한 곳이 많았어요. 1969년 경에는 남태평양이라는 곳에서 김인배 악단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때 음악을 했던 분들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했어요. 오히려 뒤에 나온 포크 가수들 가운데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꽤 있었죠.
 
Q: 한 기록에 의하면 1971년 내쉬빌에서 무대 데뷔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쉬빌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 오리지널 내쉬빌은 충무로 장수갈비 옆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사를 갔습니다. 1969~1970년 즈음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서 혁신적인 장소였는데, 청개구리 멤버들하고 연관되었던 세시봉이 메이저였다면, 내쉬빌과 디쉐네는 (요즘 용어를 빌면) 언더나 인디라고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세시봉이 포크 중심이었다면, 내쉬빌은 싸이키델릭하고 헤비한 음악을 틀었어요. 하지만 당시 그런 음악인들이 없으니까 공연만 우리 같은 언더 가수들이 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은 소공동에 있는 업소에서 연주했고 개런티 문제도 있었으니까. 또 내쉬빌은 히피 성향을 가지고 있었어요. 더 이상 말하기는 곤란하구요.
 
Q: 그러면 내쉬빌에서 어떻게 활동하셨는지, 그리고 주로 어떤 곡을 불렀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나중에 (최)성원이, (임)용환이, (유)명숙이 이렇게 4인조로 청평에서 노래를 했고, 그 이전에는 (주로 내쉬빌에서) (유)명숙이, 나, 조병제라는 친구 이렇게 셋이 트리오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조병제는 사법고시 본다고 음악을 그만 두고 그 자리에 (임)용환이가 들어온 것이죠. 그 때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의 "Leaving On A Jet Plane", "Puff", "Day Is Done" 같은 곡들을 많이 불렀고, 그 이전에는 톰 존스(Tom Jones)나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같은 사람들의 음악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 솔로 데뷔하면서는 밥 딜런(Bob Dylan) 노래를 많이 했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래도 피터 폴 앤 메리를 주로 했지요.
 
Q: 최성원 님과 1973년 여름 청평에서 처음 만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임용환 님과 만난 것은 언제인지요?(참고: 임용환은 한대수의 [멀고 먼 길](1974)에서 맛깔스러운 기타 연주를 들려준 그 인물이다).
- 아, 임용환을 처음 만난 것은 이백천 씨가 경영하던 르실랑스 무대에 섰을 때예요. 내가 그때 "Mr. Tambourine Man"을 오리지널대로 부르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객석에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오더니 이 곡을 자기 식대로 소화해서 부르더군요. 그래서 둘이 잠깐 듀엣으로 활동한 일도 있어요. 이름은 물과 불이었어요. 이름처럼 듀엣은 얼마 못 가고(좌중 웃음) 아까 말한대로 유명숙이랑 트리오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최)성원이랑 만난 것이죠. 아, 참 다른 이야기지만 그때 르실랑스에서 주말에는 개그맨 박성원이 그룹 사운드인 스푸키스와 함께 공연하던 것도 기억나는군요.
 
Q: 양병집 님은 개사나 번안한 노래를 많이 부르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 월간 팝송 주최 콘테스트에서 양병집 님이 외국 곡을 번안한 "역"을 불러 3위로 입상했다'는 오래 전 기록을 찾았었는데, 개사나 번안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 그 자료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1971년 아니면 1972년일 거예요. 번안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최초인데, 아시겠지만 서유석 씨가 부른 "타박네"란 곡이 저한테서 그냥 가져간 건데, 그 곡이 뜨고 나니까 (이)연실이가 제가 무슨 대단한 작곡가인줄 알고 곡이 필요하다고 몇 일씩 찾아와서 번안을 많이 하게 된 거예요.
 
Q: 내쉬빌 멤버들이 주축으로 만들었던 [우리들]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때는 양병집 님의 노래가 수록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발매되었을 때는 수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요. 또 그 앨범에서 기타를 쳤다고 표기된 그레고리(Gregory)는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 그게 제가 내쉬빌의 1기 멤버가 아니었다는 증거죠. 제가 처음 갔던 1971년에는 내쉬빌 1기 멤버가 슬슬 빠져나갈 때거든요. 마장동 유니버어살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막 마칠 무렵이었어요. 그때도 '(양)병집이가 이제 막 들어왔는데 뭐 좀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얘기가 있었어요. 그 앨범은 이강, 이청 형제가 엔지니어였고. 김유복 씨가 기획했다고 할 수 있죠. 직접 녹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 그 때 노래는 무대에서 하던 그대로 녹음한 거예요. 그레고리는 그때 미군였는데, 내쉬빌의 음악이 좋아서 구경을 왔다가 녹음까지 하게 된 거죠.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은 쓰리 핑거 주법을 잘 못 쳤을 때였는데, 그레고리는 기타 고수였어요.
 
Q: 유명숙, 최성원, 임용환 님과 함께 청평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에는 어떤 곡을 불렀는지요.
-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팝송을 불렀어요. 우리 노래에는 하모니를 맞춰서 부를 수 있는 곡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멤버는 원래 (최)성원이만 빼고 3명이 트리오를 하고 있었는데, 성원이가 방마다 들르다가 우리 방에 오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임)용환이가 "쟤 기타 잘 치는데 같이 하는 게 어때?" 이렇게 해서 같이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최성원은 고려대 1학년이었어요.
 
Q: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연실 님과는 어떻게 아시게 되셨는지요? 이연실 님의 한 음반을 들어보면 앞면은 일반 가요들이 수록되어 있고, 뒷면에 양병집 님이 개사한 곡들이 실려있는데, 의도적으로 반반씩 섞어서 작업하신 건가요?
- 1집 때는 잘 모르겠고, 2집인가 3집 준비하다가 곡이 부족하니까 나한테 온 거예요. 본인이 "타박네"를 듣고 왔다고 그랬었어요. 뚝섬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는데, 앨범이 나올 때만 해도 저는 아마추어라 잘 몰랐어요. 대충 앨범의 반정도, 5-6곡 해줬어요. 녹음 당시 연주하시는 분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현장에서 코드 악보 놓고 편곡했던 기억이 나네요.
 
Q: 다른 분 인터뷰에서 "넋두리" 같은 곡을 연주할 때 강근식 씨랑 호흡이 잘 안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 강근식 씨는 주로 컨트리 풍의 애드립을 구사했던 분이고, 내가 필요했던 건 포크나 포크 록 쪽이었거든요. 일단 이렇게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만 해도 가수가 일일이 연주자를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사에서 악보만 보내주고 섭외를 한 거예요. 그래서 개판이 된 거죠(웃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요. 그런데 강근식 씨를 탓할 것도 없는 것이 천생연분이란 말처럼 그 분이 이장희 씨 앨범에서는 참 연주를 훌륭하게 했잖아요?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까 문제가 있었지요.
 
Q: 성음 레코드의 나현구 사장은 이연실 씨 음반에 참여하면서 처음 만난 건가요? 나 사장님하고 지내면서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 그렇네요. 지금 생각하니까 이연실 씨로 인해서 알게 되었어요. 나 사장하고 나중에는 조금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지만 저는 그 분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업적은 꽤 높게 평가합니다. 나 사장 밑에서 강근식 씨는 세션맨 하다가 광고 음악 제작자가 되었고, 이장희 씨, 나, (이)수만이도 제작을 어떻게 하는지 노하우를 배웠으니까, 이를테면 제작자 계보가 내려 온 거예요. 또 포크 음악의 기반을 만든 사람이기도 이기도 하고. 그 분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저작권법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가수들도 지금처럼 영악하게 따지지 않았을 때니까 그때 내가 제작자를 했어도 그 분과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Q: 그러면 이연실 님 음반이나 양병집 님의 [넋두리] 같은 경우 구체적으로 녹음 과정은 어땠는지요?
- 그 당시만 해도 투 트랙 녹음이니까 성음의 뚝섬 스튜디오에 네 번인가 여섯 번인가 가서 녹음을 다 끝냈어요. 몇 곡씩 반주 집어넣고 거기에 맞춰 노래부르면 끝인 거죠. 나 사장의 스튜디오에서 6프로 정도 썼던 것 같아요.
Q: 좋은 기억은 아니시겠지만, 양병집 님의 음반이 판매금지 당했고 그 이유가 가사 저속, 계급 의식 고양 이런 것이 원인이던데...
- 그것도 나 사장을 통해 알게 됐어요. (김)민기의 음반이 판매금지 당하면서 '이런 음악이 어떤 음악이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내 음반도 나온지 3개월도 채 안돼서 나 사장이 2400장 찍어서 800장 팔리고 다 반품돼서 망했다고 했어요. 뭐 제 앨범뿐만 아니라 이연실의 "소낙비" 같은 곡들도 다 판매금지를 당했어요. '왜 금지다' 그런 것도 명확히 없었어요.
 
 
양병집 - 떠나지말아요(밥딜런 번안곡)
 
나도 독립하고 싶어서 신촌으로 가서 OX와 톰스 캐빈을 만들었죠": '이대 앞길'의 추억
 출처: 월간 [음악세계] 1988년 12월호. 자료 제공: 코너뮤직 http://www.conermusic.com
 
Q: 양병집 님은 음악활동 이외에도 여러 번 카페를 운영하셨습니다. 그 중에 신촌(아현동)에 있던 OX는 양병집 님이 처음 만든 카페로 알고 있는데요, 그 때 특별히 신촌으로 넘어온 이유가 있었는지, OX에서는 주로 어떤 음악을 틀었는지 궁금합니다.
- 내쉬빌에 모인 사람들은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했고, 그러다 보니 내쉬빌에서 독립하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그때 다들 덩치가 큰 것을 추구했는데 "외국에는 조그만 카페가 많다더라" 이런 얘기를 듣고 1973~74년 정도에 만든 거예요. 이연실이 찾아온 곳이 OX였으니까 1973년에 만든 것이 맞는 것 같네요. 크기는 한 6~7평정도? 신촌으로 간 것은 이대 앞에 차리면 건수 생길까 해서...(웃음) 찾다보니까 그 곳으로 간 거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음악은 장만경이라는 친구가 DJ를 하면서 주로 음악을 틀었어요.
 
Q: 양병집 님과 관련해서 2가지 유명한 것이 '실내장식 자주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또 당시 OX에 엄인호, 김현식, 박동률, 라원주, 이응수 씨 같은 음악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자주 들렀다고 하던데요.
- 엄인호, 김현식는 OX가 아니라 1978년 쯤에 톰스 캐빈이라는 곳을 운영할 때 많이 왔었지요. 뒤에는 같은 자리에서 청개구리라고 이름을 바꿨고... 톰스 캐빈은 오비스 캐빈을 본따서 지은 이름인데 이름만큼 잘 되지는 않았죠.
 
Q: 그러다가 대마초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른 음악인들과 비교해서 양병집 님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단지 운이 좋으셨던 건가요?
- 그 때 제가 운이 좋으려고 했는지, 대마초 사건 바로 직전에 집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반대해서 집에서 회사 일을 했어요. 자료 테이프를 보면 아시겠지만 나도 일단은 잡혀갔는데, 직업을 회사원이라고 하니까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서 빠지게 된 거죠.
 
Q: 당시 음악계에 '신촌파'라고 불리는 무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실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 양병집 님과 함께 신촌파의 '원조'라고 불리는 유지연 님 같은 분과는 어떻게 해서 만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유)지연이는 (임)용환이랑 (최)성원이랑 활동할 때 명동 왔다갔다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이백천 씨가 경영하던 르실랑스에서 만났죠. 그러니까 내쉬빌에서 같이 활동을 안 했어도 그때는 '기타를 좀 친다' 이러면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 번 같이 쳐봤는데, 다른 애들보다 (유)지연이가 피크를 잘 썼어요. 손가락 잘 안 쓰고 피킹으로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같은 효과를 내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기타 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두 번 있는데, 한 명이 (최)성원이고 또 한 명이 (유)지연이었어요.
 
Q: 그 두 분 외에 '기타 고수'는 누가 있었나요?...
- 몇 명 있었어요. 그때는 통기타 조금 치면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의 음악 같은 것을 같이 하려고 했어요. 임창제도 그랬고, 이수만도 그랬고, 이정선도 그랬고... 그런데 다들 잘 되지는 않았죠. 그러니 그때도 진짜 기타를 잘 치는 분들은 주로 클럽에서 록 음악을 하는 분들이었어요. 근데 그 분들은 카피 곡을 위주로 연주했고, 또 음악을 받혀줄 '말발'이 약했어요. 그리고 대마초 사건 때문에 대외적으로 나서기도 어색해 했구요. 내 생각에 포크는 몇몇 분들에게만 인기를 끄는 데 그치고 차라리 록이 좀 더 살았다면 우리나라의 음악이 지금보다 훨씬 탄탄했을 거예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라스트 찬스 같은 그룹은 참 잘했어요.
 
Q: 흔히들 한국에서는 포크를 별개의 장르로 생각하는데, 사실 영미권에서는 록의 일부로 생각하거든요? 한국 포크 음악계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글쎄 나도 처음에는 잘 모르고 팝송을 부르면 유식해 보이고 하니까 그렇게 시작을 한 거죠. 그런데 비슷한 음악을 하고 실력도 비슷한 친구들이 많더라구요. 내쉬빌 시절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면, 거기 가니까 다른 친구들이 벌써 레너드 코헨, 제임스 테일러 역할을 다 하고 있었어요. 박두호는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최성화가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방의경과 김광희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나 조운 바에즈(Joan Baez). 그러다 보니 나는 마땅히 할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밥 딜런의 역할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를 보다 보니까 이게 다른 음악과는 좀 다른 거예요. 그렇게 해서 포크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
 
Q: 유지연 님이 나중에 정태춘 님의 앨범에 참여하시게 된 것도 양병집 님이 연결해 주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 정태춘은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쉘부르 같은 데서 잠깐 노래불렀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 친구가 원래는 김민기를 보려했는데, 김민기는 군대에 있어서 못 만나고 '꿩 대신 닭'이라고 저를 만나러 온 거예요(웃음).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더니 "보리고개" 등 여러 가지 부르는데 잘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나 사장한테 소개를 해줬지요. (유)지연이랑은 일단 나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맞아요. 그런데 내가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정)태춘이가 원래는 나 사장하고 음반을 내기로 되어 있다가 서라벌로 옮기면서 '편곡은 유지연이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소개했지만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친해진 것이지 음반을 녹음할 때 내가 특별한 역할을 한 것은 없어요.
 
Q: 그러면 OX와 모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말씀하신 톰스 캐빈을 포함해서...
- 톰스 캐빈에는 (조)덕환이하고 (이)영재가 출현했고, (이)승희하고 (김)현식도 듀엣으로 고정 출연했었어요. (이)승희하고 (김)현식이는 두 달 정도 같이 일했었고, 내가 녹음한 "오늘 같은 날"의 오리지널 곡을 부른 윤명환이 솔로로 출연했었어요. 윤명환이는 이태원이 불러서 히트한 "솔개"를 작곡한 친구예요. 그 때는 밴드 형태가 아니라 주로 듀엣의 형태로 했는데, 이 때쯤 되니까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친구들이 연주를 하기 시작한 거죠.
"당시에는 내가 제작에 관한 노하우가 없어서...": '뮤직 모노'에서 해바라기와 들국화를 발굴하(고 빼앗기)다
 
Q: 그러다가 1980년대에 접어듭니다. 모노를 운영하기 전에 있었던 일도 죽 말씀해 주시죠. 동서남북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 같구요.
- 1980년도에 [아침이 올 때까지] 음반을 내려고 하다가 가사가 심의에 걸려서 일부는 수정하고 앨범을 발매했지요. 그 내용은 공연예술위원회(주: 현재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찾아보면 자료가 있을 거예요. 14곡 넣어서 6곡인가 걸렸었어요. 그러고 나서 1980년인가 1981년인가 1년 동안은 동서남북 음반 제작에 매달렸죠. 톰스 캐빈 할 때 후배 한 놈이 와서 '음악 잘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힘들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알고 지내다가 집에 놀러 갔는데 그 때 (김)광민이는 아직 없을 때고 (이)태열이랑 (이)동훈이만 있었는데, 노래가 팝송 같아서 좋았어요.
 
Q: 동서남북은 "국풍"에 참가했었는데, 사실 그 때 당시 "국풍"은 관제(官制)행사의 느낌이 나서 저는 반대 시위까지 했었거든요? 어떻게 해서 참가를 하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국풍에서 아무런 상도 못 탔는데...
- 우리야 그냥 돈주니까 하기로 한 거죠. 상은 못 탄 게 아니고 우리는 그때 이미 판이 나와 있었어요. 판이 나와서 내가 KBS에 다 돌렸는데 그때 진필홍 씨가 PD였고 이남기 씨가 AD, 경명철씨가 MD였어요. MD는 마스터 디렉터라고 말은 제일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제일 밑에 있는 사람이에요. 섭외하고 매일 잡일하는 사람이 경명철 씨였어요. 그런데 진필홍 씨랑 연락이 닿아서 우리가 국풍 하기 전에 KBS에서 [100분 쇼]인가 하는 프로그램에 오래 출연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참 재미있었던 게 내가 기억하기로 진필홍 씨가 외국에서 영상 이펙트들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에서 써 먹을 만한 밴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유일하게 동서남북의 음악만 그 사람이 원하던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 나와라' 그렇게 된 거예요. [100분 쇼]에서 한참 인기가 좋았는데, 이번에는 '국풍'을 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보고 "'국풍' 공연을 하는데 너희 아마추어로 도전 해볼래 아니면 프로로 나갈래"라고 물으니까 "프로로 나가겠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10만원씩 받고 프로로 출전을 한 거예요. 그때 우리가 중간에서 몇 번째로 했는데 얘네들이 인기가 매우 좋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심사위원들이 동서남북이 1등이라고 딱 말했어요. 그런데 정명철이가 보고 '얘네는 프로니까 뺍시다'고 해서 결국 이용 씨가 1등을 한 거예요.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예요.
 
Q: 동서남북에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양병집 님이 운영하신 톰스 캐빈, 청개구리, 모노는 각각 크기가 어느 정도였나요? 또 최성원 님과 인터뷰를 하다보니 모노를 함께 준비하시다가 개업 일 주일 전에 양병집 님과 싸우고 나갔다고 하시던데...
- 톰스 캐빈 하고 청개구리는 50평이었고 모노는 70평이었어요. 위치는 이대에서 신촌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술집이 많이 있었는데, 신촌역 파출소 옆 골목이었어요. OX 때는 사업으로도 재미를 봐서 '신촌이 괜찮구나'하고 톰스 캐빈을 시작했는데 망하고 나서 '모노 할 때는 복수한다'고 열심히 했죠. (최)성원이랑 있었던 일은, 나는 '사랑을 베푸는데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최)성원이는 '사랑은 능력과 별개'라는 주의거든요.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논쟁으로 시작해서 틀어졌었죠.
 
Q: 동서남북 뿐만 아니라 양병집 님은 여러 후배 가수들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 해바라기의 이주호 씨는 어떻게 해서 알게 되셨는지요.
- 해바라기가 이름도 없을 때 홍대에서 (이)주호가 "All For The Love of a Girl"이라는 노래를 블루스 풍으로 바꿔서 부르는데 죽이더라구요. 닐 영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모노에 한번 오라고 했더니 (유)익종이를 데리고 온 거예요. (유)익종이는 목소리가 예뻤죠.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같이 해라'라고 시작해서 나중에는 매니저까지 하게 된 거죠.
 
Q: 그런데 최성원 님이나 조동익 님의 증언에 따르면 모노도 내부 장식(인테리어)을 뜯어고친 것으로 악명 높던데요...(웃음)
- 그 점에 대해서는 (최)성원이나 (조)동익이가 오해하는 뒷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카페 인테리어를 바꾼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모노 옆에 '다랑'이라고 여자 나오는 술집이 있었는데 우리 집 찾아오는 애들이 술 먹고 자꾸 그 쪽에 토하니까 '다랑'에서 구청 단속반에 신고를 한 거예요. 그때는 카페에서 라이브 공연하면 불법이었잖아요. 참 나... 아무튼 그 술집에서 우리가 라이브 공연을 한다고 찔러서 어쩔 수 없이 무대를 뜯게 됐어요. (최)성원이나 (조)동익이는 이런 속사정 모를 거예요. 또 한번 무대를 뜯은 건 방금 말한 해바라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주호의 매니저를 하기로 하고 음반 제작을 하려고 돈을 꾸러 다녔거든요. 알겠지만 그때부터 음반사에서 돈을 빌려서(이른바 '마이낑 땡겨서') 음반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나 사장하고 서라벌 이 전무한테 갔는데, 둘 다 '알았다'고 하더니 연락이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 사장이 (이)주호와 직접 계약을 한 거예요. (이)주호가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그 쪽하고 계약을 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들끼리 계약하고 몇 일 있다가 이 전무가 킹박과 함께 와서 '돈을 대 준다'고 찾아 온 거예요. 그런데 (이)주호가 나사장한테 돈 얼마 받고 '싸인했다'고 하길래, 화가 나서 무대를 뜯어버린 거지요.
 
Q: (일순 침묵)... 그러면 전인권 님하고 허성욱 님이 모노에서 노래부르게 된 것은 언제 어떻게 된 것인지요. 혹시 전인권 님이 따로 또 같이 활동을 할 때부터 음악 작업에 관여를 하셨었나요?
- 라이브 업소를 차리면 다 나타납니다. 또 저는 그 맛에 합니다. 그리고 (전)인권이가 그 전에 따로 또 같이나 솔로로 한 것에 대해서는 저는 관여한 바 전혀 없습니다. (전)인권의 솔로 데뷔 앨범은 "헛사랑"을 작곡한 이일호 씨가 관여한 것이었죠.
 
Q: 말씀을 들어보면 양병집 님이 발굴한 뮤지션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최초 발굴'은 양병집 님이 많이 하셨는데 그걸 포장해서 짭짤하게 벌어먹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네요.
- 뭐 그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또 그 당시에는 내가 제작에 관한 노하우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죠. 어쩌겠어요...
 
양병집-역(逆)
 

"내 이름으로 나온 음반들에 만족하는 편은 아니에요": 음반들에 관한 이야기
 하수상한 시대 담배 꼬나 문 예술가의 초상. 양병집의 데뷔작 [넋두리](성음, SEL 20 0028, 19740320) 커버 중 일부. 같은 해 나온 한대수의 데뷔작 [멀고 먼 길]의 커버 사진과 비교하면 흥미롭다.
 
 
Q: 이제 음반에 녹음된 음악에 대해 디테일한 것들을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서울 하늘"의 원곡이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New York Town" 맞나요? 원곡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그리고 번안곡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음반을 직접 구해서 들어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 (노래를 흥얼거리며) "Standing down in New York Town..."" 네, "New York Town" 맞습니다. 이 곡은 음반으로 들은 것은 아니고 악보를 구할 수 있었어요. 들어본 적은 없는데 동요 같은 멜로디니까 악보만 보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죠. "나는 보았지요"는 원곡이 "I Can See A New Day"라고 피트 시거(Pete Seeger)가 부른 노래예요. 이 곡은 그 때 피트 시거의 음반을 듣고 번안했었어요. "서울 하늘 2"나 "그녀는" 같은 곡도 피트 시거 노래구요. 2집에 실린 "꿈속의 여인"은 미국 고전 포크인데 어떤 사람은 "Lily of the West"라고 발표하고 피터, 폴, 앤 메리는 "Flora"라고 발표를 한 곡이에요. (농담으로) 정말 내가 작사 작곡한 거 아니라고 한 게 다행이지 뭐 외국어 원본 이런 게 다 있더라구요.(웃음) "아가에게", "어느 날 오전이었지" 같은 노래들은 자작곡입니다. '나도 작곡 좀 해봐야겠다'고 해서 마른 수건 짜듯이 해서 나온 거예요.
 
Q: "타복네"의 경우 "Hush Little Baby"의 멜로디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기도 한데 아닌가요?
- 아니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그 노래가 어떻게 나왔냐 하면 옛날에 내가 어머니한테 물건 사 달라고 조르고 그러면 우리 엄마가 이야기를 해줘요. '옛날에 타복이라는 애가 살았단다. 그런데 하도 얘가 속을 썩여 가지고 엄마가 죽었구나' 이러면서 우리 어머니 목소리로 그렇게 불러주셨어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그 음파가 지금의 우리랑 달라요. 음의 파장이 정확하지 않고 7음계에서 벗어나요. 그 곡은 "두 바퀴로 간 자동차"가 뜨고 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통기타에 맞춰서 부른 거예요.
 
Q: 2집 음반의 경우 앞에서 '연주가 조금 안 맞았다'고 한 동방의 빛이 다시 연주를 맡았습니다. 강근식, 이호준 님을 비롯해서.
- 아니 그건 서라벌하고 하면서, 편곡자 선정과정에서 연락은 잘 안 되는데 서라벌 레코드 문예부장이던 방기남 씨가 '자기가 하겠다'고 그래서 내가 '그러려면 차라리 동방의 빛을 불러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죠. 뭐 사실 2집도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편은 아니에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음반마다 습작처럼 연습만 하다가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음악해서 제대로 나온 건 이번에 "반쪽이"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주: "반쪽이"는 음반 [Drop The Debt!](2003)에 실려 있다)
 
Q: 3집 음반인 [넋두리 II]는 정태춘 님 곡이 많이 있던데, 윤명환 님 곡도 있고 이분들의 곡을 받은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요?
-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양병집, 한대수, 김민기 한데 묶어서 뭐라고 하는데 그러면 솔직히 나는 좀 쪽 팔려요. 내가 작사하고 작곡한 곡은 없는데 작곡가들이 곡을 안주는 거예요. 그건 비단 저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가요계에서 통기타 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작사 작곡 시대가 열렸단 말이에요. 그러면 작사 작곡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는 거죠. 음반 섭외는 들어오는데....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게 번안이죠. 그때는 다행히 (정)태춘이나 (윤)명환이의 곡을 받았던 것이고.
 
Q: 겸손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김씨" 같은 곡은 대단한 곡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 그러니까 마른 수건도 짜면 물이 나옵니다(웃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도 마른 수건도 짜다 보니깐 나오더라구요.
 
Q: 2집 음반을 들어보면 [넋두리]에 비해서 가사가 많이 순화되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검열 때문인가요?
- 우선은 검열 때문이구요. 또 하나는 여기서 처음 밝히는데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저는 록 음악으로 풀고 싶었어요. 그래서 외국 애들하고 뒤늦게 녹음한 테이프가 있어요. 사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노래 한 건데, '내가 이런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라고 밝힌 적이 없어요. 아침이 밝아 온다는 게 그 당시 민주주의를 기다리는 거예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 한 여자를 대입해서 가사를 만든 거죠. 한용운 님의 시에서 "그대를 보았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랑 똑같은 거예요. 근데 문제는 편곡이 가볍게 되니까 전체적인 의미 전달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참 안타까워요.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곡이었는데...
 
Q: 3집에 수록된 "여름날 오후"는 2집에 수록된 "인생 50년"과 같은 곡인가요? 3집은 [우리 음악 전시회]와 비슷한 시기에 녹음하신 것 같은데요.
- 네, "인생 50년"과 같은 곡입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가 "Sultains of Swing" 같은 곡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그걸 듣고 '이런 식으로 곡을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만들었었지요. 그렇게 노력하니깐 조금씩 나오는 거죠. 3집은 서라벌 레코드에서 녹음을 했어요. 광화문 랩 스튜디오(Lab Studio)니까 16트랙으로 녹음했던 것 같네요. 프로 수(1프로는 '3시간 30분') 같은 것은 정확히 기억 못하는데 대충 8프로로 다 끝냈어요. 그 때 서울 스튜디오 정도가 24트랙이었나? 아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 스튜디오도 16트랙이었어요. 24트랙으로 바뀐 것은 뒤의 일이죠.
 
Q: 지금 보니, 3집에서 세션 하셨던 분들이 드림팀 같은데요. 엄인호, 이영재, 조동희, 최성원, 안동열 씨 등등
- 드림팀은 무슨... 그냥 모인 거예요. 이영재는 원래 엄인호랑 같이 했었어요. 이영재가 리더였고 세컨드 기타가 엄인호 해서. 그런데 (이)영재 같은 친구는 참 불운해요. (최)성원이와 달리 (이)영재와 (이)승희가 빛을 못 보는 이유가 결국은 작곡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승희는 "그대 떠난 기억"이 있고, 영재는 "지난 겨울", "노래의 날개" 이 정도만 있는 거죠. 야구로 치면 2할 8푼 정도의 타율을 가진 선수 같다고나 할까... 그에 비하면 (최)성원이는 (전)인권이가 홈런 날릴 만한 공을 던져 주는 친구고...(좌중 웃음)
 
Q: 4집은 5집하고 거의 같이 녹음하신 건가요? 나온 시점이 거의 차이가 안 나던데... 가사에 대해서 몇 곡 여쭤보면 앨범에 수록된 "무엇 때문에"는 가사가 건전가요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또 "양단 몇마름"은 작사가에 김경패 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그건 무슨 얘기냐 하면 예음사를 통해 음반을 두 장을 내기로 계약했는데(맨 처음에 한 장 내기로 했나?) 어쩌다가 한 장은 예성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게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는 자작곡인데, 가사는 건전가요가 절대 아니에요. 올바른 포크가 뭡니까? 메시지거든요.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정신 세계는 노래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김경패는 우리 어머니 이름입니다. "양단 몇 마름은" (정)태춘이가 처음 줬을 때는 가사가 1절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어머니 앞에서 노래 부르다가 "2절 가사를 써줬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가사를 써주더라고요.
 
Q: [우리 노래 전시회]랑 [넋두리 II]가 비슷한 시기에 녹음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우리 노래 전시회]에는 "이 세상 사람이"라는 곡이 실렸거든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도 (최)성원 님과의 인맥 때문인가요? 또 [우리 노래 전시회 4]를 보면 음반표지에 "삼성동 병집이 형"이라고 나와있는데 그 앨범도 참여하신 건가요?
- 그러니깐 그 당시에 (조)동익이는 내가 노래를 너무 잘한다고 생각해서 그 곡을 나한테 줬어요. 그런데 내가 부르기에는 사실 톤이 잘 안 맞았어요. 나중에는 정희남이 다시 불렀는데 둘 다 음색이 바리톤이에요. 원래 그 곡은 우리보다 음역이 높은 사람이 불렀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우리 노래 전시회 4]의 커버에 그렇게 나온 것은 그때도 역시 그냥 같이 놀 때니깐...
 
Q: 5집에 수록된 "부활가"과 "이대 앞 길" 같은 곡들은 미리 부르다가 녹음하게 된 곡인지, 아니면 음반 내기 직전에 만들어진 곡인지.
- "부활가"는 역시 "타박네"와 마찬가지로 엄마를 통해 들은 노래예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열심히 한국 구전문학을 채보하고, 고전 가요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어머니가 구전 가요를 많이 알고 계셨어요. 내가 어머니 덕을 많이 본 것이죠. "이대 앞길"은 레코딩을 앞두고 (장)인호가 "형은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의 목소리와 잘 맞는다"면서 나를 위해 만들어서 하나 써준 곡이고.
 
Q: "타복네"는 거의 모든 음반에 실려 있는데 5집의 편곡은 조금 경망스럽게 들린다는 의견이 있네요. - 네. "타복네"는 맨 마지막에 녹음한 것이 뭔지 모르겠네요. 그건 5집에도 나오고 6집에도 나오는데. 그건 호주에서 녹음했거든요. 그런데 마음에 안 들면 그러라고 하세요.(좌중 웃음) 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자꾸 '옛날 양병집'을 끌고 들어와서 이야기하는데 앞으로의 양병집에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음반 제작자로서 양병집을.
 
Q: "떠나지 말아요" 같은 경우는 원래 부르신 거는 음정을 좀 낮게 부르시고 나중에 녹음하실 때는 높게 부르신 것 같습니다.
- 두 음정 정도 높을 거예요. 처음에는 오리지널에 충실히 한다고 했는데 원곡에서는 카우벨 같은 소리가 나오거든요. 마디가 불완전 마디로 나뉘는데 세션들이 제대로 연주하기 힘드니까 마디를 편하게 자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죠.
 '포크계의 돈키호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통기타를 들고 사진 찍다. 양병집은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간 뒤, 간간이 음반을 발표해왔다. 사진은 6집 [양병집 1993: 그대 떠난 빈 자리] 뒷면에 실린 것 중 하나.
 
Q: 6집의 [그대 떠난 빈 자리]의 경우 장인호와 조영수 님의 곡이 많습니다. 장인호 씨는 호주에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고 지금도 가끔 같이 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걷는 거리"를 작곡하신 조영수 씨는 누구신지요?
- 장인호는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시드니 농대에 유학 왔던 사람입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친구라서 제가 음악을 하라고 권유했죠. 조영수는 1988년 경 신촌의 프리 버드라는 술집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때 잠시 귀국해서 프리버드 앞을 지나가는데 "I Can't stop Loving You" 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이게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니고 틀림없이 라이브 같은데 그래서 소리를 쫓아 올라갔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있더라고요. 얘한테 또 별명을 붙여준 게 있어요. 빌리 조엘이 아니고 '빌리 조'라고...(웃음)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늘색 꿈"을 작곡한 친구고 로커스트의 멤버였어요. 박지윤이가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에 대해 항의하다가 음반업계에서 '쟤 골치 아픈 애다'라고 찍힌 모양이더군요. 가사가 약하기는 하지만 이 친구 곡을 잘 쓰는 친구죠. 그런데 이렇게 재주는 있는데 도중하차하는 친구가 꽤 있어요. "오늘 같은 날" 작곡한 윤명환이도 그렇고, "그 사람"을 만든 박동률이도 그렇고.
 
Q: 6집에 최성원 님이 쓰신 곡은 영어 노래인데 어떻게 해서 영어 가사를 붙이게 되셨는지요.
- "Down The Highway"는 나한테 곡이 없으니까 솔직하게 "(최)성원아, 곡 좀 줘라"고 그랬죠. 여기에도 뒷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생략하죠. 작사는 그 당시 호주에서 분위기가 국제화까지는 아니고 하여간 외국 노래 부르고 하니까 "나도 이걸 해서 국제시장에 팔아 봐?" 이런 생각으로 했는데, 팔아 보긴 개뿔이 뭘 팔아요(좌중 웃음).
 
양병집 - 소낙비 원곡
 

"포스트 모던 포크를 하려는 후배들의 음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작자 양병집의 현재와 미래
 
 양병집은 매달 말 YWCA 마루에서 열리는 청개구리 콘서트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2003년 10월 31일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는 그가 음반을 제작한 김하용덕과 손지연이 게스트로 나왔다. 사진은 양병집 콘서트 포스터의 시안 중 하나. 출처: 윈드버드 http://www.windbird.pe.kr
 
 
Q: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Drop The Debt](2003)에 수록된 "반쪽이"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기 때문에 앨범에 참가하시게 된 건가요? 또 한국의 뮤지션으로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겠다 이런 마음도 있으셨는지요.
- 그쪽에서 이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렇게 연락이 먼저 왔죠. 그런데 항상 나에게는 철학이 있어요. 비단 나뿐만 아니고 실력이 없는데 있는 척 하는 놈들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없으면 없는 대로 인정하는 게 제일 좋아해요. 그런데 나한테 제안이 들어 왔길래 나는 나말고 신중현 씨를 추천했는데, 자꾸 나를 고집하더라구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조건이 있다. 나는 가수일 뿐이지 진짜 잘하는 프로듀서가 있으니 이 친구한테 맡겨라"라고 해서 내가 김현보 씨를 추천했고 김현보 씨가 다 맡아서 했죠. 저는 사실 너무 기뻤어요. 왜냐하면 내가 꿈꿔왔던 게 우리나라 아티스트 누가 됐던 간에 외국 사람들 하고 같이 음악을 하는 것을 원했는데 내 실력이 안되니깐 못하고 있다가 마침 김현보라는 친구가 '그러면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한 거니깐 나는 좋아요. 또 상당히 잘 나왔고.
 
Q: 제가 들어보기에 다른 나라 음악인들의 가사는 부채탕감이나 뭐 조금 더 직접적이거든요. 그런데 반해 한대수 님이랑 양병집 님 곡은 약간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쪽에서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든가 그런 일은 없었나요?
- 우리는 후에 가담을 하게 된거라 노래를 출품하는데 의의를 둔 것 같아요. 그리고 맘에 들고 안들고는 그 쪽 사정이지 우리는 뭐... (웃음)
 
Q: "무엇 때문에"에서 "공산주의 무서운 줄 알아라"는 식의 가사가 있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 남한의 독재정권도 싫지만 북한은 더 싫어한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이제 와서 인권이 어쩌구 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그걸 이야기했던 건 1988년도예요. 왜 좌익이 생기는지 생각해봤어요? 우익들이 잘못해서 그래요. 우익이 올바른 우익으로 갔으면 극단적 좌익이 안나와요. 사람들이 저를 좌익으로 오해하는데 저는 철저하게 중도에서 약간 오른쪽입니다.
 
Q: 그 동안 양병집 님에 대해 사회비판적이라는 시각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간단히 여쭤봐도 될까요?
- 저는 그저 올바른 사회, 다같이 잘사는 한국을 바라는 겁니다. 이번에 [Drop The Debt] 앨범을 만들면서 누가 반전이라는 주제를 집어넣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하냐, 내가 언제 반전한다고 했냐'고 했어요. 전쟁은 반대하지만 반전은 경우에 따라 다르죠. 월남전 같은 경우에는 뮤지션들이 전부 반대였단 말이에요. 이번 이라크 전쟁 같은 경우에 물론 부시를 찬성하는 쪽은 아니지만 논리의 비약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이데올로기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아요.
 
Q: 짧게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길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느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 좀 말씀해주세요.
- 저는 이제 제작자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포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식으로 구태의연하게 음악을 하고 있더라구요. 나는 포스트 모던 포크라고 하는데 새로운 포크 음악을 하는 후배들의 음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영구 귀국해서 제작한 음반이 김하용덕 님의 음반 [Somewhere We Dreamed]와 이번에 나올 손지연의 음반 [실화(My Life's Story)]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하용덕 님은 16년차이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만, 손지연은 어떤음악인(가수)인가요?
- (손)지연이의 음악은 상처받은 사람이 좋아할 음악일 겁니다. 살아온 게 간단치 않고.... 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죠. 아무튼 이 아이는 작곡에 천재적인 면이 있습니다. "기다림" 같은 곡에서 C 장조에 Gm 코드가 나오는 진행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써 놓은 곡도 많습니다. 가사의 경우 "꿈"이라는 노래에서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닌데 아직도 이 길을 걷고 있나"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죠. 이번 음반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미친 년"이라는 곡이 있는데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에서 코러스 터질 때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요 이 아이의 노래는 자신의 조각품 같습니다.
 
Q: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많이 손해를 보시면서도 항상 뭔가를 계속 하시려고 하시는 점이 존경스럽습니다.
- 별 말씀을... 그런데 내가 장사 잘 못하는 건 다 아네 하하. 뭐 생계에 지장 없으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고, 언제나 음악하는 친구들은 있으니까 같이 하는 거죠.
Q: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웹진 [weiv]에 자주 들러주세요.(웃음)  20031028 
 
 
 
 
<생맥주 아닌 막걸리 마셔/ 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한 오해들>

'통기타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해 양병집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잘못 포장돼왔다"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 가수로 활약했던 가수들 중 가정형편이 유복한 사람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당시 청년문화를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는 "이들의 노래를 향유한 대다수의 젊은이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염색해 입었다"면서 청바지류가 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맥주도 마찬가지다. 값이 부담없는 막걸리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생맥주는 어쩌다 큰돈 생기면 모를까, 비싸서 잘먹지 못했어요. 대신 종로 청진옥에서 빈대떡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많이 마셨죠". 그때 막걸리는 지금처럼 쌀과 옥수수로 만든 고급스러운 맛이 아니었다. '카바이트 막걸리'로 불렀는데 '호롱불'을 피우는 데 쓰인 '카바이트'가 들어간 것이다. 먹고나면 속을 불편하게 해 골목마다 '억억'대는 풍경을 만들어낸 '주범'이라고 설명했다. "통기타도 '해바라기'의 이주호나 '어니언스'의 임창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잘치던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거기 그 노래가 있었네> (16)양병집의 '두바퀴로…'   


***비뚤어진 세상 타박하던 삐딱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뜨는 돛단배/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만이 한숨을 내쉰다∼'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1973년 세상에 나왔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부르면 딱 좋을 가사, 비현실적인 노랫말이 당시 심상치 않은 세상을 엿보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음반은 발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삐딱한 가사' 때문에 판매금지됐다. 겨우 800장이 팔렸을 뿐이다.
외국곡에 가사를 달아 번안곡을 만든 양병집(51.본명 양준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대수.김민기와 더불어 저항가수로 불리는 그는 대중보다는 음악평론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잃어버린 전설' '서울하늘', 독립군의 노래를 정리한 '부활가' 등 그가 부른 노래들과 이연실의 '소낙비', 서유석의 '타박네' 등 그가 만든 노래들이 나름대로의 색깔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는 85년 '양병집 넋두리Ⅱ'에 담긴 '오늘 같은 날' '우리의 김씨' 등을 예로 들며 "양병집은 사라져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묵묵히 태웠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양병집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한대수였다. 국산품 애용운동이 한창인데도 사회지도층 자녀들은 외제 쓰기에 바빴던 시절. 그도 외제 화장품만 쓰던 누나들과 한바탕 싸우고 '두바퀴로∼'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시대적인 감상이 음악으로 파고들기 전까지 노래는 그저 취미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 종로의 우미관 옆 음악감상실 '디쉐네', 명동에 자리한 미도파백화점 5층의 '미도파 싸롱'을 드나들었다. 68.69년 당시에는 이인성 악단과 이길봉 악단이 활동했고 현미.위키리.유주영이 노래하던 곳이다.

"70년대에는 외국곡의 악보가 흔하지 않았어요. 귀로 듣고 스스로 악보를 만들어 연주해야했죠". 양병집은 낯선 음악을 악보로 옮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번안곡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정태춘과 전인권을 세상에 알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무명의 정태춘이 75년 그를 불쑥 찾아왔다. 당시 양병집은 자신의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가수활동을 접고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평택에서 곡을 준비해온 '단꼬바지' 차림의 정태춘. "김민기씨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있어 대신 저를 찾아왔더군요. 얼굴이 순박해 보였는데 당시 불러 보였던 '보리고개' '겨울나무'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양병집은 81년 서울 신촌의 라이브업소 '뮤직모노'를 열었다. 전인권.정태춘을 비롯해 '동서남북' 등 노래꾼들이 이곳에서 기타를 치며 그와 어울렸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데모, 걸핏하면 휴교하는 대학의 악순환. 가게 앞에 경찰차가 진을 쳐 1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는 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끈질기게 음악인생을 반대하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셨던 구전을 정리한 노래 '타박네'는 그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99년 13년만에 다시 돌아온 양병집은 지난해 호주 영주권을 반납했다.

그는 최근 노래 '16년차이'로 유명한 김하용덕의 새앨범을 내놓는 등 음반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말로는 포크가 죽었다, 들을 음악이 없다고 하지만 애써 음악을 내놓으면 아무도 듣지 않아 결국 망하게 돼요. 그러나 미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음반기획자로 활동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는 '포크'가 단지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70년대 음악쯤으로 단순화한 것에 불만이 크다. 포크의 강한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발라드에 통기타를 입힌 것이 마치 포크음악인양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청바지 차림으로 특유의 포크가수 분위기를 풍기는 양병집. "변한 것 없다"는 요즘 세상에 그는 또 어떤 노래들을 선보일까?
 / 글 출처 경향신문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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