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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에즈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전통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흑인 영가와 백인 영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의 초기 앨범들은 대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 또는 미국의 서민층에서
널리 불려졌던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차용한 이러한 포크(Folk) 음악들은 동시대 사람들(Folk)에 의해 불려진 시대의 정서와 삶의 애환, 꿈과 이상이
생생히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노래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란 삶의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며 개인은
물론 집단 의식의 총체적 표출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을 가장
인간적인 향취가 물신 풍기는 포크 음악을 통해 펼쳐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기교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실리는 하이톤의 소프라노 보컬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동시에 따스한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기운을 가득 내뿜는다. 이것은 바로 그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그 영혼의 울림에 동화되며 그 안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존 바에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The River In The Pines'나 'Donna Donna', 'Mary Hamilton' 등의
전통 발라드에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찬가 'We Shall Overcome', 그리고 'Poor Wayfaring Stranger'와 'Diamonds & Rust' 등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한 친화력과 포근히 가슴을 감싸오는 매력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 바에즈는 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멕시코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고,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역시 희곡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들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이사함에 따라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몇 년간을 보내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했다.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으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56년, 비폭력주의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2세의 강의를 들은 그녀는 그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에 만난
간디주의 철학자 아이라 샌드펄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58년 MIT에서 강의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메사추세츠주로 이사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보스톤의
한 커피하우스에서의 포크 공연은 결국 그녀를 포크 뮤지션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 오데타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을 이루게 된 포크 음악의 중심지였고,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전공 수업보다는 그곳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존 바에즈가 정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59년 케임브리지의 포크뮤직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포크 뮤지션인 빌 우드를 만나 곧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빌과 테드 알레비조스라는
뮤지션과 함께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발표하며 레코드 데뷔를 이루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띈 그녀는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주간의 그 공연은 그녀의 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포크 싱어
밥 깁슨이 같은 해 7월 11일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운 것이다.
존 바에즈의 예정되지 않았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이듬해인 60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정식으로 참여하였고,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며 60년대의 포크 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그녀의 동생인 미미 바에즈(Mimi Baez) 역시 이후 남편인 리처드 파리냐와 함께 듀엣 미미 앤 리처드 파리냐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에서 처음으로 밥 딜런을 만났다. 이후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의 숱한 콘서트를 통해 딜런을 여러 차례 소개했고, 이 두 연인들은 곧 60년대 미국 포크 씬의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61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에즈는 곧 첫 전국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다.
이 투어는 62년 10월 [In Concert]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앨범 차트 10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 앨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실린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63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개최된 제 1회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과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는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피트 시거,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한 이때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실황은 [Newport Broadside]와 [The Evening Concert Vol. 1]으로 발매가 되는데,
이 앨범들은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8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흑인 공민권을 위한 데모 행진에서 그녀는 25만의 청중 앞에서 'We Shall Overcome'을 불렀고,
이 곡은 곧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65년 영국 차트 26위에 올랐다.

밥 딜런이 라이너 노트를 쓴 [In Concert, Part 2](63)는 미국 차트 7위에 올랐고, 6개월 후에는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한다.
특히 이 작품에는 버밍햄의 마일즈 대학에서 녹음된 저항가요 'We Shall Overcome'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군비 증강의 일환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수입의 60%를 원천징수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 존 바에즈가 거기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물론, 텍사스에서 있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에 참여한다.
그 외에도 그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고 흑인 공민권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는 등
저항의식을 가진 실천가와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완전한 어쿠스틱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리고 영국 차트 3위에 오름으로써 영국에서의 최대 히트작인 된
[Joan Baez 5]가 발매되었고, 그녀의 애창곡 66곡과 에릭 폰 슈미트의 삽화가 곁들여진 베스트 셀러
[The Joan Baez Songbook]이 출간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필 오크스의 곡 'There But For Fortune'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65년의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에 노미네이트 된다.
65년 봄 바에즈와 딜런의 연인 관계는 끝을 맞이했고, 5월에는 미국 밖에서 행해진 최초의 큰 공연인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Farewell, Angelina]가 발표되었다.

66년 초, 그녀의 초기 세 장의 앨범들이 미국 레코드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드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전 시위와
흑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64명의 사형선고자들의 감형을 촉구하는 철야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역자는 그녀의 정치적 언급을 오역하도록
CIA 요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철회하였고 CIA 측은 이 일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극렬한 반전운동 경력 탓이었다.
독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 모임인 '미국애국부인회'에서 그녀의 공연 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바에즈는 30,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멋지게 응수했다.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녀는 이어 8월에 새로운 앨범 [Joan]을 발표한다. 10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군 입소대 입구를 점거한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68년 3월 26일, 존 바에즈는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 리더이자 행동주의자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의 회고록 [새벽(Daybreak)]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다.
69년,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20개월을 복역해야만 했다. 존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하여 차트 36위에 올렸고, 8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71년에는 그녀와 데이빗이 함께 쓴 책 [Coming Out]이 출간되었으며 사운드트랙 앨범 [Carry It On]이 발매된다.
10월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쥘 다생과 그의 아내이자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Sacco And Vanzetti]는 존과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후 뱅가드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Blessed Are..]가 발매되었고, 밴드(Band)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뱅가드 레이블을 떠난 그녀의 새 보금자리는 A&M이었다.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은 이제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녀의 음악 스타일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72년 5월 A&M에서의 첫 앨범 [Come From The Shadows]는 미국 차트 48위에 오른다. 앨범에서 커트된 싱글
'In The Quiet Morning'은 그녀의 동생 미미 파리냐의 작품으로 재니스 조플린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차트 69위를 기록한다.
74년 스페인어로 부른 앨범 [Gracias A La Vida]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녀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튜지니아, 아르헨티나 등을 포함한 세계 투어에 들어간다.
A&M 시절의 최고작인 [Diamond & Rust]는 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조지아 주의 아틀랜트시는 8월 2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정하고 그녀에게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75년 10월부터 밥 딜런과
믹 론슨, 로저 맥귄, 자니 미첼 등으로 이루어진 롤링 썬더 리뷰와 함께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된
더블라이트 세트인 [From Every Stage]로 결실을 맺는다.
76년 말, 그녀의 자작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s]가 발매되었고 밥 딜런과의 두 번째 투어를 시작한다.
이듬해의 스페인 투어 도중 그녀는 40년간의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 생방송에 출연하여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79년, 그녀의 자작곡과 직접 그린 스케치들이 담긴 책 [The Songbook And Then I Wrote...]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Honest Lullaby]가 발매되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음악 시상식에서 78년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그녀는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위원회의 첫 번째 행동은 미국 내 다섯 개의 메이저 신문에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의 내용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KRON-TV,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바에즈는 80년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앤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매되지 않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 이때의 투어는 이듬해에 [There But For Fortune: Joan Baez In Latin America]라는 영화로 TV에 방영되었다.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 속에서도 그녀는 밥 딜런과의 LA 공연과 폴 사이먼과의 보스턴 공연,
잭슨 브라운과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하였다.

83년의 유럽 투어를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Europe 83]이 유럽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랑스에서 골드를 기록했고,
아카데미 찰스 크로스 어워드에서 '83년의 베스트 라이브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에서의 투어 중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여 12만 명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의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디 거스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인 [Hard Travellin''에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85년, 그녀는 자신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클럽 47의 25주년 콘서트에 참여하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한다. 이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의 투어를 마친 뒤 69년 이래 처음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이후 그녀는 꾸준한 사회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95년 4월에 뉴욕의 바텀 라인 클럽에서의 실황을 담은
[Ring Them Bells]는 화려한 게스트들과 그녀의 감성이 살아 숨쉬는 멋진 라이브 앨범이었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Manijoa 2005 SPRING-
http://www.koryo.hs.kr/samgak36/joanbaez/index.html
 
아래의 글들은 추가로 발췌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Ceasefire콘서트후 거리로 행진하는 군중들>

 이 포스팅은 지난 8월 21일 TV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 부근에 마련된 반전 시위 캠프에서 공연하고 있는
존 바에즈를 본 순간 쓰려고 마음먹었다.  60세를 훌쩍 넘겨버린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힘차고 아름다웠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을까.  왜 아직까지 그녀의 노래가 유효한 것일까.
그러나 아들을 이라크 전에서 잃은 신디 시한과 많은 사람들의 외침에도 꿈쩍 않고 목장에 버티던 부시를 움직이게 한 것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였다.  덕분에 워싱턴까지의 행진은 취소되었고 한 달 후 존은 카트리나로 인해 숨진 사람들을 위한
자선 공연을 벌였다. 그리고 9월 25일 워싱턴에서 “사격중지(Operation; Ceasefire Concert)”라는 반전 콘서트를 기획하였다.
바에즈에 대한 포스팅을 함으로써 이라크 추가파병에 대한 반대의견을 암암리에 던지려던 필자의 의도 역시 카트리나라는
대재앙의 참혹함을 지켜보며 차일피일 미뤄지다 이제야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존”이라고 읽는 사람들도 있고
“조안”으로 읽는 사람들도 있으나 필자가 오래 전부터 부르던 버릇대로 본문에서는 “존”으로 표기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존 바에즈의 공식 사이트(www.joanbaez.com)에서 참고 했고 수록된 사진들은 위의 사이트와 존 바에즈를 좋아하는
팬 사이트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복사해왔음을 미리 밝혀둔다.
 
   <워싱턴에서 공연중인 존 바에즈와 연설하는 신디 시한>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테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출신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트랜드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의 콘설던트 일도 맡는 바람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 했다.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녀의 경력 중
특이한 것은 아버지를 따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어린 시절의 일 년을(1951년)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로 MIT와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되는 유능한 교수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방위산업체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는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멕시코 계라는 이유 때문에 존 바에즈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 하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가정적인 영향도 큰 듯 하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바에즈는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10대를 보냈다.  아마도 동부보다는 서부 쪽이 인종차별 등에
조금은 관대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교내 합창반에서 노래했고 그녀가 첫 기타를 가졌던 1956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듬해 간디주의 철학자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난 것이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에즈는 MIT로 직장을 옮긴 아버지를 따라 메사추세츠의 벨몬트로 이사한다.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
보스톤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공부보다는 그 지역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보스톤 지역은 우디 거슬리와 피트 시거등에 의해
포크의 중심지가 되어있었다.
바에즈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9년 케임브리지의 포크 클럽인 ‘클럽47’에서였다.  이곳에서 빌 우드(bill Wood)를
만나고 테비 알레비조스(Ted Alevizos)까지 합류하여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지역 음반사인
베리타스에서 발표한다.  그녀를 눈여겨보았던 공연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은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Gate of horn에 출연시킨다.  2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의 재능은 쉽게 눈에 뜨였다. 그녀에게 반한 포크 싱어
밥 깁슨(Bob Gibson)이 그 해 7월에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웠다. 
바에즈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듬해인 60년 정식으로 참여하여 포크와 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게 된다.  뱅가드 시절의 그녀는 8장의 골드 앨범과 1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한다.
 
19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티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처음으로 밥 딜런(Bob Dylan)을
만나게 된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두 사람을 연인으로 발전시켰고 베트남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지만 추측컨데 미모의 모델에게 밥 딜런이 넘어갔다는 게 정설인 듯 하다.
얼마 전 소위 운동권 인물과의 결혼과 관련된 포스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극렬 운동권이었을 존 바에즈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해에 처음으로 전미 콘서트 투어에 들어간 바에즈는 콘서트를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Civil Rights) 확보를 위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을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는 커버스토리로
실으면서 그녀를 현재 신인 중 가장 재능 있는 가수라고 평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을 노래했다. (이 곡은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뒤늦게 65년 영국차트 26위에 올랐다.) 이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 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킹목사는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을 말했다.  이 행진엔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해리 밸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등의 의식 있는 음악가들이 함께 했다.  그리고 11월 22일 달라스에서
케네디가 숨지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1963년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워싱턴 대행진중 공연중인 존 바에즈와 밥 딜런>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밥 딜런과 함께 출연한지 정확하게 한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 베트남을 대대적으로 공습함으로써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 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세금징수에 불복했고(당시 이러한 행동을 하는 유명인이 많았다)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그녀는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집회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런던에서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66년 그녀의 초기 앨범 3장이 미국 음반협회로부터 골든 앨범으로 인정 받았다.  존바에즈는 시종일관 약자 편에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반전 시위 현장에서, 흑인의 인권을 보장 받기 위한 시위에서 쉬지 않고 노래했고 직접 시위에 참여하였다. 
미국 사회의 보수층은 이런 존 바에즈가 달갑지 않았다. 19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그녀의 통역가는 CIA요원으로부터 존 바에즈의 정치적 발언들을 오역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CIA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일본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독립전쟁 유공자 모임인 DAR(the Do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 그녀의 반전운동을 문제 삼아 공연을 거부하는 바람에 예정되었던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 에서의 공연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들의 공연 허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즉석에서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같은 존 바에즈의 행동들은 미국의 보수 우익들에겐 불편함을 넘어서 적대적인 감정마저 만들게 되었다.  이해 10월 그녀는 오클랜드에
있는 군 입소대 입구를 무단으로 점거하여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달 10월 볼리비아의 밀림속에서의 체 게바라 사망소식은
다가올 1968년의 암울함과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킹 목사와 행진하는 존>
 

  1968년 3월 26일.  존은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 리더이자 행동가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와 결혼한다. 
일주일 후 킹목사가 암살 당하고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고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다. 
젊은이들은 서구가 그동안 지속해온 기성세대의 모든 권위에 저항했다.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쟁취하고자 했다. 미국의 젊은이들도 징집영장을 태워버리고 기존의 권위에 도전했다.  1969년 그녀의 남편 데이빗은
징병기피 혐의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결국 20개월을 복역한 후인 71년 3월에 출소하게 된다. 남편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David’s Album”을 발표하고, 69년 8월 임신한 몸으로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야스거라는 사람의 농장에서
3일간 열렸던 평화와 사랑의 제전은 격동의 60년대를 마무리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12월 아들인 가브리엘 얼(Gabriel Earl)을 출산한다.
70년대의 시작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도어스의 짐 모리슨등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올맨 브라더스의 듀언 올맨, 버즈의 클라렌스 화이트등이 교통사고로 숨진다.  젊은 이들을 대변하던 우상들이 사라져 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순수의 추락”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밥 딜런은 전기기타를 들었고 포크 음악은 대중들 보다는 “그들만의 리그”로
향하고 있었다.  대중음악은 상업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록의 혁명성이나 포크의 순수성을 믿는 것은 바보처럼 여겨 졌다.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은 존 바에즈 뿐이었다.  그녀는 침묵할 수 없었다. 
71년 10월 캘리포니아에서 군사정권아래 신음하는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고 뱅가드에서의 마지막 앨범
“Blassed are”를 발표하고 이 앨범은 골드 앨범이 된다.  이듬해 그녀는 A&M으로 레이블을 옮겼고, 그 해 4월 A&M시절의
최대 명곡 “Diamond and Rust”가 발표된다.  73년엔 국재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의 기금마련을 위한 활동을 하고, 75년 10월에는
밥 딜런, 믹 론슨, 로저 맥귄, 조니 미첼 등과 함께 미국 투어를 시작한다.  76년 말 자작곡으로 이루어진 앨범 “Gulf winds”가 발표되고,
77년 스페인 투어에서는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TV생방송에서 “No Nos Moveran
(We shall not be moved)”를 불렀다.
 
존 바에즈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그 어떤 위협도 무릅쓰고 노래를 불렀다.  베트남의 하노이, 북 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다.  78년 산타나와 비치보이스 등과 함께
계획된 레닌그라드 공연이 특별한 이유 없이 취소되자 모스크바를 방문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79년 그녀가 설립한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Humanitas International Human Rights Committee)의 회장직을 13년 동안 맡아 활동하였다.
이 위원회는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80년 존 바에즈는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엔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 콘서트와
인권실태 여행 도중 그녀는 생명의 위협과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기까지 하였다.  또한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와중에도
밥 딜런과의 LA공연, 폴 사이먼의 보스톤 공연, 잭슨 브라운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 했다. 83년 유럽 투어에 나섰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 명예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87년 그녀의 자서전 “And a voice to sing with”가 출판되고 이스라엘과 가자지구를 여행한다.  또한 카네기 홀에서
니카라구아 콘트라 반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반대하는 자선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바에즈의 최근 모습들- 좌로부터 1987,1995,1997,2003>
 
60년대의 포크 음악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었다는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을 꼽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당시의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이고 양심적인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 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서 두 사람 모두 전통적인(?) 어코스틱 기타를 버리고
전기기타를 들었지만, 결국 형식보다는 음악의 내용에 얼마나 충실했는가가 한 음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70년대 중반 이후 그저 사랑 타령에 머물러 있었던 밥 딜런 보다는 존 바에즈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의
평가 조차도 존 바에즈가 밥 딜런 보다 못한 것은 그녀가 직접 많은 곡을 쓰지 못했다는 점과, 아마도 사람들 마음속에 습관적인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70년대의 그녀 음반이 거의 소개되지 않았는데, 이미 위의 글에서 밝혔듯이 그녀의
노래와 행동이 독재 정권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음반이 금지곡으로 분류되어 있음에 기인한다. 
보통 황학동의 불법복제물(빽판)로써만 접근이 가능했고 그마저도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형식을 갖는 대중음악가를 통틀어 존 바에즈 만큼 일생 동안 현실문제에 관여해 행동하고 저항하는 음악가를 본 적이 없다. 
반전, 군비축소, 인종차별반대, 환경보호, 빈곤, 기아, 인권 등의 모든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 그녀의 삶을 정의 하자면
“평화와 사랑”으로 축약될 수 있을 성 싶다.
거액의 게런티를 제시한 어느 프로모터에게 던진 그녀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 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존 바에즈. 그녀는 3옥타브를 넘나드는 비브라토의 미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 만이 아니고 직접 행동하고
실천하는 용기 있는 음악가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  좌파든 우파이든
모든 폭력을 부정하며 세상 어느 곳이라도 그녀가 필요한 곳이라면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이것이 아직까지 존 바에즈의 노래가 유효한
이유이다.
 
 
 
-PS-
1. Joan Baez - Marry Hamilton
2. 올해 국내의 한 기획사가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일에 존 바에즈를 초청하여 DMZ에서 “반전을 위한 평화 콘서트”를 준비했었다.
구체적인 일정까지 협의했으나 이미 64세인 존 바에즈의 건강상태 때문에 공연이 취소 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3. 최근 그녀의 공연 티켓은 보통 90~120불 정도이다.  그리 싼 가격은 아니지만 공연수익의 대분분은 다시 사회로 환원된다.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Joan Baez)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 Tom Jones(M/V)
 
 

 
Joan Baez-Col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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