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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시인이 있다. 살아서 전설이 됐는지, 죽어서 전설이 됐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건, 해인사에서 전설이 됐다는 것이다.
‘가야산해인사’라는 편액을 단 산문을 들어서자니, 갸우뚱 고개가 흔들린다. 가야산에 비추어도, 해인사에 비추어도, 기둥의 단청이 지나치게 화려하다싶어 흔들린 그 고갯짓은, 옳았다. 산문 뒤에는 ‘홍류문(紅流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면 그렇지, 가야산인(伽倻山人)들이 이 정도의 풍류도 잊은 채 무턱대고 화려함만 좇았을 리는 없다.
홍류문은 곧 ‘홍류동(紅流洞)’의 입구다. 전설이 된 시인 최치원은 이곳에서 비로소 세상을 벗어났다. 후인들은 ‘신선’이 됐다고 말한다. 이 때 남긴 이른바 ‘은둔의 시(遁世詩)’는 이렇다.
狂噴疊石吼重灣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미친 듯한 물결 첩첩 바위에 부딪쳐 산을 울리니
사람의 소리는 지척에서도 분간키 어렵네.
끊이지 않는 시비 소리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감싸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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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림을 받는 세계인의 보물이다.
- 큰 시비에 단련되지 않고는 이런 시를 남길 수는 없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당나라의 관리가 되어 ‘황소의 난’을 겪었다. 이때 그는 ‘토황소격’을 지어 천하에 문명을 떨쳤다. 그가 다시 신라에 돌아온 때는 885년(헌강왕 11), 나이 29세 때였다. 신라는 기울고 있었다. 시무책(時務策)을 지어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다. 진성왕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아찬에 올랐다. 하지만 진골 귀족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왕건의 집권을 예견했다. 하지만 고려 정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홍류동으로 은둔했다. 끊이지 않는 세상의 시비가 신선을 만든 것이다. 역시, 번뇌는 보리(菩提)의 자양분이다.
- 과연 가야산의 지음(知音)다운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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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황문에서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 부드러운 곡선이 공간의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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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을 거슬러 올라 해인사로 든다. 이 길은 성큼성큼 걸어야 한다. 종종걸음도 사뿐사뿐도 안 될 일이다. 가야산도 해인사도 아주 ‘센’ 곳이기 때문이다. 전각의 앉음새도, 가야산의 산세도, 절집의 가풍도 세다. 이 모든 것이 가야산의 기운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땅을 끔찍이 사랑했던 한 사람, 이중환은 가야산을 이렇게 말했다.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만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아오른 듯하고, 공중에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
봉황 흉내를 낸 뱁새가 진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시 흉내라는 건 사람의 전매품이다. 가야산의 기풍을 좇아 성큼성큼 걸어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주문에 들어선 순간 그것이 공연한 흉내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겠다. 일주문에서 봉황문까지 100미터 남짓한 길은 깊고 그윽하다. 구름다리처럼 부드럽게 휘어 오른다.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깊어 보인다. 그 길이 내게 말한다. ‘이래서 너는 하수인 거야. 부드러움을 내장하지 않은 강함은 폭력배의 조무래기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걸음만 호방하다고 장부가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소인배는 하나도 없을 거야.’
비로소 나는 내 보폭을 찾는다. 봉황문을 지나서 해탈문 계단까지 길이 살짝 틀어져 있다. 해탈문 계단이 주는 수직성이 상당히 누그러진다. 스님들의 누더기 옷 같은 보기 좋은 틈새다.
역시, 해인사는 기운차다. 해탈문을 지나 구광루 앞마당에 몸을 세우면, 훤칠한 전각들이 가야산을 통째로 들어올리고 있다. 과연 가야산의 지음(知音)다운 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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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고려대장경판전의 창살. 위아래의 크기가 다른 창틀은 항온 항습을 유지하게 하는 과학적 보존의 비결을 담고 있다. 2)기와와 진흙을 켜로 쌓은 담장. 산지 가람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조형감이 돋보인다. 3)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자락으로 곧 용이 승천할 것 같다. 자연과 조응하는 우리 건축 고유의 아름다움이다. 4)종각 안의 목어. 늘 깨어 있으라는 의미의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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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루 마당에서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길은 수굿하다. 구광루 좌우에 자그마한 문을 만들어, 어느 쪽으로 오르든 대적광전을 대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해인사의 모든 문은, 되바라진 자세로 부처님과 마주서게 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가는 우뚝한 기운에 질려서 팔만대장경의 이삭 하나 줍지 못하고 돌아서게 될지도 모른다.
해인사의 정점은 팔만대장경이다. 대적광전 뒤, 장경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날렵하다. 산허리를 최소한으로 허물고 터를 얻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수직성을 최대한 누그러뜨린다. 석축을 접고 물려서 담장을 쌓았고, 장경판전으로 드는 문에는 차례로 ‘팔만대장경’, ‘장경각’, ‘보안당’이라는 편액을 걸어 문의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자연이 허용한 입지를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인간화시킨 공간 미학이다. ‘팔만장경’이라는 장광설과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知)’라는 전광석화 같은 선(禪)의 기용이 함께 번뜩인다.
흔히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을 말할 때, 경판고의 온·습도 조절이나 통풍 기능 같은 보존기술의 과학성을 빠뜨리지 않는다. 경판의 완비성과 정확성도 물론이다. 조성 동기의 호국적 성격도 늘 강조된다. 이런 점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에 의미를 가두는 것은 고려대장경의 진정한 의미를 박제화 하는 일이다.
- 고려대장경, 문자 너머의 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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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초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좋은 계절이다. 하늘이 경전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인간이 할 일은 오직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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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상, 지금 세상, 다음 세상의 모든 인류가 팔만대장경의 주인이다.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은 거기에 있다.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과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국보 제206호)이 나라의 보물이고 세계문화유산이란 사실은 부차적인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대몽항전이라는 극도의 혼란 상황에서 조성됐다.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양한 계층의 재물 보시자와 몸 보시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수준이 다른 각수가 참여하여 점차적으로 수준을 높여간 점도 한 방증이다. 같은 각수가 참가 첫해에는 단 2장을 팠다가 그 다음해에는 수십 장을 판 사실도 자발성의 좋은 예다.
오늘날의 공장 시스템처럼 개인별 목표를 정해뒀다면 판각의 완성도는 들쑥날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 1장을 판 각수와 수십 장을 판 각수의 결과물이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도록 작업량을 통제한 것이다. 만약 조정이나 정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면 결코 있을 수 없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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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가야산의 호방한 기운을 떠받칠 만한 장대한 기골의 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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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의 조성이 국사였던 불사였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다. 내가 한없이 부러운 건 당대인들의 삶 속에서 생동한 붓다의 목소리다. 그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은 지성의 보고였고 삶의 구체적 길잡이였다. 불교는 생동하는 가르침이었다.
고려대장경판의 가치를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에서 찾는 일은 민망스럽다. 그 속에 담긴 가르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식’이 되지 못하는 한, 장경판고는 고려대장경이라는 보물을 보관하는, 그렇지만 누구도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은 꽉 닫힌 창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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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산해인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해인사 산문. 안쪽에는 홍류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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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판전 옆 학사대에 선다. 최치원이 종적을 감추기 전에 꽂은 지팡이가 살아난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전나무가 있는 곳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홍제암과 원당암으로 건네주는 외나무다리를 들썩이는 계곡 물소리도 좋고, 차분히 가라앉은 전각들의 뒷모습도 좋다. 삼매에 든 것인지 잠에 빠진 것인지 알 길 없는 선승의 모습 같다.
홍류동, 일주문에서 봉황문으로 향하는 휘어진 길, 절묘한 자리에 앉아서 사물을 보는 최고의 안목을 열어주는 문(門)들, 그리고 고려대장경. 내 마음속에 가야산의 불꽃을 일게 하는 문자 너머의 문자들이다.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동화작가
/ 사진 정정현 부장 rockart@chosun.com
- 산행 쪽지정보
홍류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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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류동 계곡. 기암괴석에 부딪치는 계류 소리가 세속의 거친 소리를 다 거두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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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약 4Km의 계곡. 계류에 비친 가을 단풍이 물까지 붉게 물들인다 하여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 계곡의 진정한 매력은 단풍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 기암괴석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최치원이 세상과 인연을 끊으며, “끊이지 않는 시비 소리 들릴까 두려워 /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감싸 놓았네” 하고 노래한 바로 그 소리다.
해인사 산문 언저리의 농산정(문화재자료 제172호)과 낙화담, 분옥폭포 등 명소를 품에 안고 있다. 농산정 맞은편 바위벼랑에는 최치원 선생의 친필이 암각되어 있다. 합천8경 중 제3경으로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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